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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으로 보는 세계 불교사 10
법광(法光) 2020-05-20 00:24:27, 조회 : 66, 추천 : 0



Ⅱ. 동남아시아불교사


1 스리랑카

인도 동남쪽에 자리한 작은 섬인 스리랑카는 땀바빤니 Tambapanni, 랑카디빠Lankadipa , 실론 Ceylon 등으로 불렸다. 기원전 6세기경 북인도에서 아리안Aryan 계통의 싱할라족sinhalese 이 이주하면서 세운 국가다. '사자의 자손' 이라는 의미로 사자국獅子國 Sinhala이라고도 한다. 현대 스리랑카에서는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 갈등인 타밀 Tamil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기에 인도에서 강제로 이주해 온 타밀인들의 힌두교와 전통적인 싱할라의 불교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이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테라바다 Theravada (상좌부) 불교 전통 교학의 근원이 되는 국가로서 법주法州 Dhamma-dipa라고 불릴 정도로 불교의 비중이 지대하다. 1972년 이후 싱할라의 독립과 자립, 불교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취지를 담은 민족적 명칭인 스리랑카 Sri Lanka를 국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① 아누라다뿌라 시대
1) 불교의 유입과 번영
가장 유명한 싱할라 역사서인 『대사』에서는 기원전 3세기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B.C. 307~B.C. 267) 왕이 불교로 개종하는 순간 담불라 Dambulla 동굴에 마법의 대나무가 솟았다고 묘사하면서 스리랑카에 불교가 유입되는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데와남삐야 띳사 왕은 아누라다뿌라 Anuradhapura에서 동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마힌딸레 Mahintale에서 사슴 사냥을 하다가 인도 아라한 전법사인 마힌다 Mahinda 장로를 우연히 만난다. 마힌다 장로는 인도의 제3차 결집 이후 9개 지역에 파견한 전법사 중 한 명으로 아소카 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불살생不發生 ahimsa이라는 불교적 덕목을 교설함으로써 왕이 불교에 귀의하도록 이끌었다. 이후 왕은 대사大寺 Mahavihara를 건립하여 비구 승가를 세우고, 이듬해 마힌다 장로의 누이 상가밋따sanghamitta 장로니가 비구니 11명과 함께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를 가져오면서 비구니 승가도 성립된다. 이때부터 보리수의 공양 의식은 부처님 오신 날과 함께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불교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

데와남삐야 띳사 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불교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듯따가마니Duthagamani (B.C. 161~B.C. 137) 왕 때로, 그는 타밀 왕에게서 왕권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벌이면서 “나는 왕국이 아니라 불교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선포했을 만큼 국가 존립과 수호의 원리를 불교에 두었다. 그는 이후 도시 근교에 마리짜왓띠 Maricavatti 사원을 지어 승단에 바치고 수많은 정사精舍와 탑을 건설하면서 불교 발전에 기여한다.


2) 승가의 성립과 분열
스리랑카 불교는 왓따가마니 아바야vatagamani Abhaya (B.C. 89~ B.C. 77) 왕 때부터 진정한 번성기를 맞이한다. 또한 이 시기는 최초로 승가의 분열이 이루어져 불교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왓따가마니 아바야 왕은 남인도 촐라 Cola 왕국의 침략으로 수년간의 피신 끝에 왕위에 복귀하여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마하띳사Mahatissa 장로에게 감사의 표시로 무외산사無畏山寺 Abhayagiri vihara를 건립하여 하사한다. 하지만 기존의 대사파大寺派 Mahavihara Nikaya 승려들은 마하띳사가 왕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를 대사파에서 축출한다. 이후 마하띳사가 5백 명의 동조자들과 함께 무외산사를 본거지로 삼는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 Abhayagiri Nikaya 를 세우는데, 이때부터 스리랑카 종파는 두 개로 나눠지면서 최초의 승단 분열이 일어난다.

무외산사파는 자유롭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테라바다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을 함께 연구하면서 대중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대승사상과 함께 산스끄리뜨어가 소개되면서 다양한 분파들의 견해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에 반해 대사파는 기존의 사상인 테라바다불교만 연구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대승사상의 유입을 반대한다. 즉 스리랑카의 첫 승가 분열은 전통 테라바다를 고수하는 보수파와 대승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진보파의 분열을 의미한다.

인도 독자부 Vaijiputtaka의 담마루찌Dhammaruci 法喜와 그의 제자 몇 명은 왓따가마니 아바야 왕 때 스리랑카로 건너와 무외산사에서 머물면서 자신들의 불교사상을 전파했다. 무외산사파는 이 사상들을 전폭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법희파法喜派 Dhammaruci Nikaya 라고도 불린다. 국왕이 무외산사파에게 호의적이었던 분위기 속에서 대승불교 교리를 자유롭게 탐구하던 무외산사파는 당시 주류였던 대사파를 이기기 위해 담마루찌와 동맹한 것으로 보인다.


3) 기타림사
무외산사파의 자유로운 대승사상 탐구는 보하리까 띳싸Voharika Tissa(209~231) 왕 때에도 이어진다. 당시 인도 대승 계통의 방광부方廣部 Vetullavada 일파가 무외산사에 들어왔는데 보하리까 띳싸 왕은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쫓아냈다. 이후 고따바야 Gothabhaya(249~262) 왕 시대에 다시 방광부의 사상을 따르는 사가라sagara 장로를 위시한 무외산사파의 일부가 남산南山 Dakkhinagiri에 정착하여 종파를 이루니 이를 해부파 海部派 Sagariya Nikaya, 혹은 남사파 南寺派 Dakkhinarihara Nikaya 라고 한다. 당시 방광 비구 60명은 인도로 쫓겨나고 대승 경전은 불태워졌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이 후에 기타림사祇陀林寺 Jetavana vihara 에 정착하면서 기타림사파가 성립된다. 이 종파는 4세기에서부터 5세기 초기에 걸쳐 크게 번성하면서 대사파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스리랑카불교는 세 종파로 나뉘게 된다.


4) 붓다고사와 대사파
● 5세기에 접어든 마하나마Mahanama(406~428) 왕 시대에는 테라바다 교학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이 무렵 인도의 위대한 주석가로 널리 칭송받는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가 스리랑카로 건너와 불교사에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긴다. 그는 마가다국 출신으로 스리랑카 각지에 있던 싱할라어 삼장과 주석서들을 수집 · 번역하고 편찬했다. 특히 테라바다 교리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적 저서인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을 저술한 업적은 대승불교의 나가르주나 Nagarjuna가 이룩한 업적에 필적한다고 칭송받는다.

같은 시기에 테라바다 불교의 역사서인 『대사』, 『도사』가 빨리어로 편찬된 것으로 보아 교학 연구가 굉장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교학적 발전을 주도한 대사파는 테라바다 정법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빨리 삼장pali tipitaka을 구송으로만 전승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딸레의 바위 사원 근처인 알루 위하라 Alu vihara에 경전을 보관하고 최초로 빨리 삼장을 패엽경貝葉經으로 필사하면서 경전의 성문화와 문자화를 이끌었다.


5) 무외산사파와 밀교
5세기 무외산사에서 약 2년간 머물렀던 중국의 구법승 법현法顯은 『고승전高僧傳』에 “스리랑카 승려가 약 3만 명이며, 그중에서 무외산사에는 5천 명, 대사에는 3천 명, 마힌딸레에는 2천 명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 당시 스리랑카에서 불교가 번성했으며 무외산사파가 대세였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하지만 6세기 이후 스리랑카는 강력한 왕권을 가진 성왕이 등장하지 않으면서 오랜 기간 동안 정치와 사회적 상황이 불안하여 불교 교단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고, 무외산사파가 밀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부터 밀교 중심의 불교사가 전개된다.

밀교를 스리랑카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남인도 출신인 와지라보디 Vajrabodhi 金剛智(671~741)이다. 그가 도입한 밀교는 『금강정경金剛頂經』에 의한 금강부 밀 교 계통으로 무외산사파의 위랑꾸라라마 Virankurarama 승원을 근거지로 삼아 발전하였다. 이후 그의 제자인 아모가와지라 Amocharajra 不生金剛(705~774)에 의해서 스리랑카 전역에 밀교가 성행했다. 이는 국왕 앗가보디 6세 Aggabodhi VI(733~772)가 밀교를 크게 환영하고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모가와지라는 스승의 유지에 따라 3년 동안 밀교를 수학한 후 5백 부가 넘는 산스끄리뜨 경론서와 밀교 전적을 가지고 중국으로 가서 밀교를 전파하여 후에 광지삼장廣智三藏 이 되었다. 이후부터 스리랑카의 밀교는 좌도左道적인 경향이 강해지고 힌두교도인 타밀족이 신봉하면서 점차 쇠락하여 11세기까지 암흑시대를 맞이한다.





부처님 법 안에서-정행스님

성종(性宗) [2020-05-20] : 법광 거사님,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세계불교사 열 번째 내용은 내일(목요일) 아침방송에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오늘도 부처님 법 안에서 평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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