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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온이란 무엇인가? (구제님 구제를 위한 중생 교육자료 1)
보성(寶聖) 2014-08-28 10:43:37, 조회 : 1,134, 추천 : 0
오온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존재'라는 말을 쓰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러한 존재란 없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육체적.정신적인 힘 또는 에너지라는 표현밖에 없다. 이 힘 또는 에너지가 오온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존재'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오온의 결합에 불과하다. 그러면 오온이란 무엇인가?


1. 첫번째는 물질(色.색)의 집합체이다. 물질은 전통적으로 견고성, 유동성, 열성, 운동성으로 알려져 있는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있다(증지부 48). 보통 이것들은 땅(地), 물(水), 불(火), 풍(風)이라고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단순한 땅, 불, 물, 바람이 아니다. 불교 사상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진리에 대한 미묘한 문제들을 다룬 아비담마(Abhidhamma, 論)에서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견고성은 확장의 요소이다. 사물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이 확장의 요소에 기인한다. 사물을 볼 때 우리는 공간 속에 뻗어 있는 어떤 것을 보고 거기에 명칭을 부여한다. 확장의 요소는 고체뿐만 아니라 액체 속에도 존재한다.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볼 때조차 우리는 견고성을 보기 때문이다. 바위 딱딱한 성질, 풀의 부드러운 성질, 즉 사물 속에 내재한 무거운 성질과 가벼운 성질 또한 견고성에 속한다. 이것은 견고성의 고유한 특성이다.


유동성은 응집성의 요소이다. 이 요소 때문에 물질의 미립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쌓일 수 있다. 액체는 응집력이 대단히 강하다. 고체와 달리 액체는 분리된 뒤에도 달라붙는 성질이 있다. 고체는 일단 부서지거나 분리되고 나면 미립자들이 다시 달라붙지 않는다. 고체를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금속을 용접할 때처럼 온도를 높여 고체를 액체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물을 볼 때 우리는 단지 경계가 있는 확장된 형태만을 본다. 이 확장된 형태 즉 사물의 '형상'은 응집력 때문에 가능하다.


열성은 열(기)의 요소이다. 이 요소는 성숙 시키고 강해지도록 하는 성질이 있고 다른 삼대(三大)에 열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모든 중생들과 식물의 생명력은 이 요소에 의해 보존된다. 모든 사물의 형체에서 우리는 열기를 느낀다. 이것은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대상이 차다고 말할 때 이것은 이 특별한 대상의 열기가 우리 몸의 열기보다 낮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온도가 우리 몸의 온도보다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차가움'이라는 것도 또한 낮은 상태에 있는 열의 요소라는 것이 확실하다.


운동성은 운동의 요소이다. 이것은 위치의 이동이다. 이것 또한 상대적이다. 한 물체가 움직이느냐 아니냐를 알기 위해서는 고정된 한 점이 필요하다. 이 점에 의해서 운동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 속에서 움직임이 전혀 없는 대상은 없다. 그래서 '안정성'이라는 것도 운동의 요소가 된다. 운동은 열에 의존한다. 열이 전혀 없는 원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열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이론으로나 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원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적 대상은 사대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세해 보일지라도 모두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견고성의 요소가 우세하면 이 물질적 대상은 고체로 불린다.


항상 공존하는 이 사대로부터 24가지의 다른 물질적 현상과 성질들이 파생된다. 이 파생물들에는 다섯 가지 감각 기능인 눈(眼.안), 귀(耳.이), 코(鼻.비), 혀(舌.설), 몸(身.신)과 이들에 대응하는 감각 대상, 즉 볼 수 있는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 포함된다. 물질의 집합체는 인간의 몸에 속하건 외부 세계에 속하건 모든 물질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2. 두 번째는 감각(受.수)의 집합체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이 집합체에 속한다. 감각에는 유쾌한 것, 불쾌한 것,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것 세 가지가 있다. 감각은 접촉에 의해서 일어난다. 형체를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물체를 만지고, 의식의 대상을 인식했을 때 인간은 감각을 느낀다(이 여섯 종류의 감각들은 각기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통해서 일어난다. 불교 사상에서는 마음을 여섯 번째 기능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눈, 형체, 안식(眼識)이 함께 만나는 것, 이것이 바로 접촉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화합 이다. 접촉이란 감각 기관(안이비설신의), 감각 대상(색성향미촉법), 감각에 대한 의식이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모두 함께 존재할 때 감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각과 접촉의 고유한 성질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들이 동일한 대상으로부터 똑같은 감각을 느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어떤 특별한 대상에서 유쾌한 느낌을 가지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불쾌한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람은 동일한 대상에서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의식의 작용들이 갖는 기능에 달려 있다. 게다가 어떤 사람에게 유쾌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던 감각 대상이 다른 환경에 처했을 때는 그에게 불쾌하거나 중성적인 느낌을 일으킬 수 도 있다. 그리고 한 감각 기능에는 유쾌한 것이 다른 감각 기능에는 불쾌할 수 도 있다. 예를 들면 과일이 볼품이 없어 보여도 맛있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감각이 어떻게 다양한 방식의 접촉에 의해 조건지어지는가를 알게 된다.


3. 세 번째는 지각(想.상)의 집합체이다. 지각 기능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대상 등 둘 다를 인식하는 것이다. 감각과 마찬가지로 지각에도 형상에 대한 지각, 소리, 냄새, 맛, 접촉, 의식의 대상에 대한 지각 등 여섯 가지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각은 단순한 감각 지각을 말한다.


자각(의식의 기능)과 인식(지각의 기능)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 의식이 대상을 자각하게 되면 동시에 지각의 정신적인 요소가 대상의 두드러진 특성을 파악해서 이 대상과 다른 대상을 구별하게 된다. 이 두드러진 특징 때문에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같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사실 매번 우리는 같은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억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지각이다.


지각이 종종 우리를 속인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지각의 환상 또는 지각의 왜곡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은 예가 그 점을 잘 나타내 준다. 들판에 씨를 뿌린 농부는 그 씨앗을 보호하기 위하여 허수아비를 세운다. 그러면 당분간 새들이 허수아비를 사람으로 알고 덤벼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지각의 왜곡이다. 마찬가지로 감각과 의식의 대상들도 잘못된 인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을 속인다. 그래서 붓다는 지각을 아지랭이에 비유한다.


왜곡된 지각이건 아니건 어떤 특별한 지각이 자주 일어나게 되면, 그 지각은 점점 강해져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그래서 그 지각을 제거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의 결과에 대해서는 [숫다니파타(Suttanipata)]의 다음 게송에 잘 설명되어 있다.


지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그에게는 더 이상 속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통찰력을 얻은 사람은
모든 미혹을 멈춘다
그러나 지각에 매달려 있고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이 세상과 다투면서 살아간다 (847)


4. 네 번째는 의지적인 형성력(行.행)의 집합체이다(의지적인 형성력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오온 중에서 행(行.Samkhara)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집합체에는 위에서 언급한 감각과 지각을 제외한 모든 정신적인 요소들이 포함된다. 아비담마에서 52가지의 정신적인 요소를 말하고 있다. 감각과 지각도 이 52가지 정신적인 요소에 속하지만 이것들은 의지적인 활동이 아니다. 나머지 50가지는 모두 의식적, 의지적 형성력에 속한다.



의지는 의식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한다. 불교에서는 어떤 행위에 의지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그 행위를 업(業)으로 여기지 않는다. 감각이나 지각과 마찬가지로 이 의지적인 형성력의 집합체에도 형상을 향한 의지, 소리, 냄새, 맛, 육체적 접촉, 의식을 대상을 향한 의지 등 6가지가 있다.


5. 다섯 번째는 의식(識)의 집합체 이다(일반적으로 심(心.citta), 의(意.mano), 식(識.vinnana)는 동일한 말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 이것은 오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 의식 없이는 의식의 부산물, 즉 의식의 작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52가지의 모든 의식 작용의 저장소가 된다. 의식과 의식의 작용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공존한다.


그러면 의식은 기능은 무엇인가? 감각, 지각, 의지적인 형성력과 마찬가지로 의식에도 여섯 종류가 있고 그 기능도 다양하다. 의식은 의식의 토대와 대상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모든 감각들은 감각 기능(기관)들과 외부 세계가 접촉함으로써 경험 된다.



정신적인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의 기능은 다른 다섯 가지 기능들처럼 만지거나 지각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눈은 색깔의 세계를, 즉 볼 수 있는 대상을 인식하고, 귀는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마음(의식)은 개념과 사고의 세계를 인식한다. 기능(indriya)은 문자 그대로 말하면 '장(長)', '주인'을 의미한다. 형상은 눈의 기능에 의해서만 볼 수 있지 귀로 볼수는 없다. 소리도 귀의 기능에 의해서만 들을 수 있다. 사고와 개념의 세계로 넘어오면 의식의 기능이 모두 의식계의 주인이 된다. 눈은 사고할 수도 없고 개념을 형성할 수도 없다. 그러나 눈은 볼 수 있는 형상, 즉 색깔의 세계를 보는 도구이다.


여기서 의식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눈과 형체, 귀와 소리 등 감각 기능과 감각 대상들 사이에 기능적인 관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자각은 의식을 통해서 온다. 바꾸어 말하면 적절한 의식이 없다면 감각 대상은 특별한 자극을 느낄 수 없다. 눈과 형상이 동시에 존재할 때 이 둘에 의지해서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귀와 소리가 동시에 존재할 때 이식(耳識)이 있고, 나아가 의식의 기능과 의식의 대상이 동시에 존재할 때 의식(意識)이 있게 된다(중부 148). 그리고 눈과 형상과 안식이 함께 있을 때, 이 동시 발생을 접촉이라 한다. 이 접촉으로 부터 감각등이 있게 된다.


의식은 다섯 가지 감각의 문과 의식의 문, 이 여섯 가지 문(六根.육근.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에서 일어나는 자극을 통해 발생한다. 감각 기능과 감각 대상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식이 일어나면 의식도 독립되지 못하고 조건지어지게 된다. 의식은 물질의 반대 개념인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다. 마음이라고 불리는 여섯 가지 기능의 영양분이 되는 사고와 생각 또한 의존적이고 조건 지어져 있다. 사고와 생각은 다섯 가지 다른 감각 기능들(五根.오근. 안이비설신)이 경험하는 외부 세계에 의존한다.


이 다섯 가지 기능들은 단지 현재에서만, 그것도 감각 대상들이 특별한 기능과 직접 접촉했을 때만 작용한다. 그러나 의식 기능은 이미 감각 기관에 의해 인식된 형상, 소리, 냄새, 맛, 또는 접촉이 있건 없건 간에 감각 대상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과거에 눈이 접촉했던 볼 수 있는 대상은 비록 대상이 눈 앞에 없다 하더라도 바로 이 순간 마음의 기능에 의해서 마음에 떠 올릴 수 있다. 다른 감각 대상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주관적이다. 그래서 이 감각들 중에 어떤 것은 경험하기 어렵다. 의식의 이러한 활동은 미묘해서 때때로 일반적인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래서 온 우주는 단순한 감각 덩어리가 된다. 색깔 있는 천과 뭔가 견고한 것, 즉 펼쳐져 있는 어떤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하나의 실체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의식이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들을 단지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해석이 감각 통로를 통해 나타난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물질 세계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화학적인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크기, 형태뿐만 아니라 부피도 없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다섯 가지 감각 기관에 의해 인식(분별)되는 것도 아니다. 의식은 다른 요소들(오근)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의 주인이다. 그리고 의식은 '자아', '영혼'의 형태로 영원히 지속되는 정신이 아님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의식은 물질에 반대되는 정신도 아니고 물질에서 파생되는 것도 아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자아 또는 영혼의 형태로 된 의식이 인간 내부에 존재해서 일생을 통해 지속되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한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윤회하여 현생과 다음생을 연결시켜 준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붓다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우리는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의 38번째 경에서 아주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사티(Sati)라고 하는, 붓다의 한 제자가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세존께서 가려쳐 주신 법은 저의 의식이 재생하면서 윤회하고 떠돌아 다닌다고 이해 했습니다."
사티가 붓다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자 붓다는 그에게 물었다.
"사티야, 그 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저기서 행한 선하고 악한 행위의 결과를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어리석은 사티야, 내가 그런 식으로 법을 가르친다고 누구한테 들었느냐? 의식은 조건이 있어야
일어나고 조건이 없으면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내가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나서 붓다는 의식의 다양한 형태를 설하고 예를 들어 보임으로써 어떻게 의식이 조건에 의존해서 일어나는지를 명확히 밝혔다.



이상이 오온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오온 가운데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들은 변하기 마련이다. 철학은 제쳐두고 과학적인 견지에서 물질을 본다 하더라도, 조건지어지고 합성된 것은 어느것도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어느것이든지 고통을 담고 있고 슬픔을 내포하고 있다.


독자들이 이러한 괴로움에 대한 불교의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려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붓다가 지적했듯이, 모든 존재는 즐거움과 기쁨을 열망한다. 그들은 불쾌함과 기쁘지 않은 것을 몹시 싫어한다.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고 이미 행복한 사람들도 점점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암울하고 불교도들은 정신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인생을 살아간다. 삶의 진실한 본질을 이해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사물의 무상함 때문에 당황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고 주관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늙음, 병듦, 죽음과 같은 인생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만나면 사람들은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그러나 용감하게 맞설 준비가 되어 있을 때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인생을 바라보는 것은 염세적인 것도 아니고 낙천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사실적인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물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불안의 원리, 즉 괴로움이라는 고유한 성질을 무시하는 사람은 삶의 변화에 직면했을 때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마음을 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계속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대와 정반대로 일이 전개되면 더 많은 괴로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인생과, 인생에 관계된 일들에 대해 초연함을 닦을 필요가 있다. 초연함은 좌절, 실망, 정신적인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 가지 일이나 또 다른 일에 매달리지 않고, 그것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것이 마음을 통제하는 확실한 치료법이다. 집착하는 마음을 뿌리째 뽑지 않는다면 불만족이 항상 따라다닐 것이다.


붓다는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보고 행복을 행복으로 본다. 그래서 우주의 모든 즐거움도 다른 조건 지어진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덧없는 것이라고 설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덧없는 즐거움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즐거움도 조만간 불만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초연함이 염세주의 낙천주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해독제이다. 초연함은 평등한 마음이지 무뚝뚝한 무관심이 아니다. 이것이 고요하고 집중된 마음의 결과이다. 인생의 변화에 직면했을 때 마음에 혼란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초연함을 닦는 사람은 당황하지 않는다.


한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자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달관에 이른 듯한 대답을 했다.


"그는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왔고, 초대 받지 않았는데도 떠났다. 그가 왔을 때 처럼 갈 때도 그렇게 갔다. 한탄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처럼 사람들은 초연함으로 불행을 이겨 낸다. 이것이 바로 초연함의 이점이다. 초연함은 이익과 손실,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역경에 동요되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는 올바른 견해로 이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생긴다. 이와 같이 고요하고 평등한 마음이 인간을 괴로움으로부터 깨달음과 해탈로 인도한다.


절대적인 행복이란 조건지어지고 합성된 사물들에서 생기지 않는다. 이 순간 대단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 다음 순간에는 실망의 원천으로 바뀐다. 즐거움은 금세 끝나 버리고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 감각 기능의  단순한 만족을 우리는 즐거움, 기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만족은 행복이 아니다. 기쁨 또한 괴로움이다. 기쁨도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견해로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는 내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계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잃도록 하는 단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은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단지 고통만 안겨 줄 뿐이다. 그것들은 인생의 비참한 병폐에 일시적인 통증의 완화만 가져다 줄 뿐이다. 이것이 변화로 인해서 생긴 괴로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움이 결코 활동을 멈추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괴로움은 이런저런 형태로 작용하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의 형태로 항상 활동 중이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괴로움은 오온의 결합에서 생성되고 발달하고 소멸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오온의 결합을 제외한다면 기분 나쁜 괴로움이란 있을 수 없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모든 존재는 부조화와 불만족을 피하고 즐거움, 기쁨,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지만 행복이 계속 지속되지는 못한다. 즐거움은 마치 두 고통 사이의 틈새처럼 보인다. 오온의 결합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괴로움, 불만족이 있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괴로움도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괴로움도 조건지어진 것이고 변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는 고통의 이러한 모습을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탄생의 아픔, 희망 없는 날들의 아픔,
피 끓는 청춘의 아픔과 중년의 아픔,
으스스한 황혼의 아픔과 숨막히는 죽음,
이러한 것들이 가련한 우리의 인생을 채우네.


붓다도 이렇게 설했다.


오온은 참으로 짐이네.
그 짐을 내려 놓는 것이
바로 행복이네.
이것은 열반, 절대적인 행복이다. (법구경 204)


제자들에게 괴로움의 의미를 설할 때, 괴로움을 극복한 붓다는 어두운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항상 행복해 보였고, 고요했으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음 게송은 만족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잘 보여 준다.


진실로 행복하게 살아간다네
짐이 없는 우리들은
항상 기쁨을 머금고 살아간다네
빛을 내는 신들(光音天)처럼  (법구경 200)


그는 제자들을 우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깨달음의 한 요소인 기쁨이라는 매우 중요한 자질을 계발하도록 고무했다.

붓다의 이러한 훈계를 [테라 가타(Thera-gatha)]와 [테리 가타(Theri-gata)]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비구.비구니들의 기쁨에 찬 노래들이 실려 있다.



불교를 냉정하게 연구 한다면 불교가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주는 메시지이지 염세주의나 패배주의적인 철학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옛길 중 성서러운 고(苦)의 진리 발췌]
보성(寶聖) [2014-08-28] : 읽어나 볼까?
보성(寶聖) [2014-08-28] : 이해나 할까?
보성(寶聖) [2014-08-28] : 그래도 댓글은 달겠지?
보성(寶聖) [2014-08-28] : 또 앵무새라고 할까?
보성(寶聖) [2014-08-28] : 당신의 신통력으로 세월호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보성(寶聖) [2014-08-28] : 죽은 사람은 못 살리나?
법광(法光) [2014-08-29] : 오온은 참으로 짐이네...^^ 감사합니다 . 보성 거사님 항상 행복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_()_
보성(寶聖) [2014-08-29] : _()_ 법광 거사님, 평안한 저녁 시간 되십시오. 두 손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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