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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란 무엇인가 ? (구제님 구제를 위한 중생 교육자료 2.)
보성(寶聖) 2014-08-30 14:06:55, 조회 : 890,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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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다른 사람의 사상의 자유를 결코 방해하지 않았다. 사상의 자유는 모든 사람들의 천부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그의 외모, 성격, 정신적인 성향과 어울리는 생활 방식을 다른 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형태의 강요도 나쁜 일이다. 관심도 없는 믿음을 받아 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가장 불쾌한 강요이다. 이와 같은 강제적인 주입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느 곳에서도 좋은 일이 아니다.


붓다의 유일한 관심사는 인간이든 초인간이든 아니면 인간보다 하위의 존재이든 간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어떤 외부적인 힘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나 경외심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었다.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믿음이나 두려움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교도들의 생각이다. 법에 대한 진실은 통찰력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지 맹목적인 믿음이나 어떤 알려진 것 또는 미지의 것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역사는 무지에 빠진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두려움 때문에 전능한 외적인 존재가 있다는 관념이 생겨 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단 이 관념이 생기게 되면, 인간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산물에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힌다.


붓다는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 대한 단순한 믿음과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존재의 훌륭한 상태를 향해서 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라한과라는 최상의 마지막 해탈을 얻지는 못한다). 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 길을 열심히 달려 가는 사람들, 그들은 깨달음과 아라한과를 향해 가고 있다."(중부 22)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볼 때 붓다는 제자들이 무분별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떤 것을 인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붓다는 맹목적인 믿음이나 경외심은 진리를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그것을 버리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무익한 의례나 의식을 신봉하는 일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단식이나 강에서 목욕하기, 동물의 희생 등과 같이 다순히 외적인 것들을 버리는 행위는 인간을 정화 시키지 못하며 신성하고 고귀하게 만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붓다와 순다리카 바라밧자(Sundarika Bharadvaja)라는 바라문 사이에 있었던 대화에서 그러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때 붓다는 제자들에게 해탈 후에 수행자가 어떻게 자신을 닦아야 하는가를 설하면서, 마음이 번뇌에서 벗어난 사람, 청정한 삶이 완성된 사람,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은 내적으로 목욕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때 붓다 곁에 앉아 있던 바라밧자가 이 말을 듣고 물었다.


"존자 고타마는 바후카 강에 목욕하러 가십니까?"
"바라문아, 바후카 강에는 어떤 이익이 있으냐?"
"존자 고타마여, 참으로 많은 현인들이 그 강을 믿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악행을 바후카강에서 씻어 냅니다."


그러자 붓다는 강에서 목욕한다고 해서 악행의 먼지에 쌓인 사람들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시킨 뒤 가르침을 설했다.


"바라문아, 바로 여기 (붓다의 법과 계율)에서 목욕하라, 모든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라. 그대가 만약 거짓말이나 살생을 하지 않고 훔치지 않으며, 믿음을 가지고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 강에 가느냐? 그대의 집에 있는 우물 또한 그 강이니라."(중부 17)


붓다는 미신과 잔인함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학대와 약탈을 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행복에 방해가 되는 어떤 형태의 행위도 할 수 없도록 했다.


그렇다면 불교란 무엇인가 ?


어떤 사람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종교라고 부르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철학으로 또는 철학과 종교가 합쳐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단지 윤리적인 규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불교는 마음의 완전한 자유를 가져다 주는 도덕적, 정신적, 지적인 수행 방법이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법과 계율'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이. "신의 힘을 믿고 신의 힘을 숭배하고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소망을 나타내기 위한 행위를 의미하며, 그러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는 복종, 존경, 숭배를 받을 자격을 갖춘 고도의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진 존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The short oxford english dictionary. 1956)이라면, 불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명백히 그러한 의미에서의 종교는 아닌 것이다.  


불교 사상에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선하고 악한 행위에 대하여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어떤 형태의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나 확신은 없다. 불교도는 붓다에게 귀의하지만 그러나 붓다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보장은 없다. 붓다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각자 해탈을 얻을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스승일 뿐이다.


예를 들면 갈림길에 서 있는 이정표는 길의 방향을 알려 주지만 이정표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는 일은 여행자가 할 일이다. 이정표가 여행자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 의사는 병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써준다. 그러나 그 처방전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은 환자가 할 일이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붓다의 태도는 이해심 있고 자비로운 스승이나 의사의 태도와 같다.


최상의 예배는 진리에 대한 넓은 이해와 통찰을 가지고 무지를 없애고 번뇌를 완전히 제거한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하는 예배이다.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진실한 구원자이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그들에게 빌지 않는다. 불교도들은 진리를 보여 주는 사람들이 단지 진정한 행복과 해탈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그들을 존경할 따름이다. 행복이란 자신이 얻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더 좋게도 더 나쁘게도 만들 수 없다.


"깨끗함과 더러움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깨끗하게도 더럽게도 할 수 없다.
(법구경 165)


80세의 나이로 쿠시나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임종을 맞이하면서 붓다는 (천상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바치는 꽃을 보고 아난다에게 말했다.


"아난다야, 바르게 생활하고 법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최상의 예의로 여래를 바르게 공경하고 반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너도 생활을 바르게 하고 법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와 같이 너 자신을 닦아야 한다." (장부 16)


법에 따라 살아가라는 붓다의 이러한 조언은,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잘 다스리는 것이지 단순히 붓다에게 꽃을 바치는 일이 아님을 보여 준다. 붓다가 강조한 것은 올바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이 불상이나 어떤 신성한 대상 앞에 꽃을 올리거나 등불을 켜서 붓다의 고귀한 품성을 기리는 것은 누구에게 기원하는 행위나 숭배의 의례, 의식 또는 행위가 아니다. 곧 시들어 버릴 꽃들과 꺼져 버릴 등불은 그들에게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즉 무상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불상이 사색과 명상의 대상이 되어 그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붓다의 자질을 배우려고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이 단순한 공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급하게 "이것은 우상 숭배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 엉터리 결론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불교가 철학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철학의 정의가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진다. 어원적으로 볼 때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철학이란 지혜의 탐구와 탐구된 지혜를 둘 다 모두 의미한다.' 인도 사상에서 철학은 '진리를 보는 것'이라는 의미의 다르샤나(darsana)에 해당된다. 간단히 말해서 철학의 목적은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


불교 역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사색적인 추론이나 이론적인 구조, 지식의 단순한 획득이나 축적이 아니다. 붓다는 그의 가르침이 가지는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즉 지식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삶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연구하는 것이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바로 모든 현상적인 존재는 괴롭다(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과 이 괴로운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철학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이다. 깨끗함(淸淨.청정)은 지혜와 이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상응부 214). 그렇다고 해서 붓다가 단순히 지식만을 내세운 것은 아니다. 붓다는 지식은 순수한 마음과 뛰어난 도덕성을 함께 지녀야 한다고 했다. 마음을 이해하고 닦음으로써 얻어진 지혜가 진정한 지혜이다. 이것은 도움을 가져다 주는 지혜이지 단순한 사색이나 논리 또는 허울 좋은 추리가 아니다. 이와 같이 불교는 단순히 지혜를 사랑하거나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헌신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비록 이러한 것들이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고 인류에게 영향을 준다 하더라도). 불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정, 깨달음 즉 궁극적인 해탈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실제로 적용하도록 고무한다.


우리가 비록 붓다의 가르침을 '불교(Buddhism)'라 부르고 '주의(-ism)'나 '논(-ology)' 가운데 포함시키지만 어떤 명칭을 붙이든지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종교, 철학, 불교 또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이름을 붙여도 좋다. 이러한 명칭들은 진리와 해탈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파팃사(Upatissa)와 콜리타(Kolita) (뒤에 붓다의 제자가 된 사리풋타와 마하목갈라나)가 해탈의 가르침을 찾아 편력하고 있을 때, 우파팃사는 탁발을 하고 있는 앗사지(Assaji)비구 (붓다의 최초 다섯 비구 가운데 한 분)를 보았다. 우파팃사는 그의 위엄 있는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질문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우파팃사는 앗사지 비구를 따라 그의 수행처로 갔다. 그리고 앗사지 비구에게 다가가서 인사한 뒤 앗사지 비구가 따르는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서 물었다. 앗사지 비구는 대답하기를 주저하면서 겸손하게 말했다.


"저는 그분의 법과 계율을 상세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미만은 간단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우파팃사의 대답이 흥미롭다.
"벗이여, 적게 말하든 많이 말하든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 의미입니다. 많은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앗사지 비구는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포괄하는 연기의 이이를 간단한 게송으로 읊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생기는 것
붓다는 그 원인을 설명 하셨네
그리고 또한 그 소멸까지도
이것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네


우파팃사는 곧 그 의미를 이해하고 깨달음의 첫번째 단계를 성취했다. 그리고 '모여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되어 있다.'(Vinaya 40)는 것을 깨달았다.


올바른 이해로 향한 이야기나 토론이 아니라면 아무리 해 봐야 그것은 우리를 해탈로 인도해 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가르침과 올바른 이해이다. 우리는 자연, 나무, 꽃, 들, 강에서조차 올바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떨어지는 잎사귀, 흐르는 물, 산불, 꺼지는 등불 들을 보고서도 깨달음을 얻고 번뇌를 제거한 예들도 많다. 이것들이 인간의 심금을 울려서 사물들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해탈하도록  도와준다. 그렇다. 연꽃은 해를 기다리다 햇빛이 비치자마자 꽃을 피워 모두에게 기쁨을 가져다준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인간과 사물의 궁극적인 기원을 밝히려는 시도는 없다. 그것은 '우주는 영원한가, 그렇지 않은가?'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는 문제를 탐구하지는 않는다.


붓다는 인간을 혼란에 빠뜨리고 정신적인 안정만 깨뜨려 놓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인류가 재앙과 질병으로부터 구제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붓다는 그런 일에 대답하기를 꺼렸고 종종 문제가 자체가 잘못 설정된 그런 것들에 대한 설명을 자제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인생의 보편적인 진리인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설명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괴로움의 실체를 느끼게 하고 괴로움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붓다는 자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하고 무엇을 설명하지 않는지 명확히 말해 주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붓다의 이러한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그의 깨달음을 의심해서 붓다를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라고 불렀다. 학자들은 논쟁하고 골똘히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면 방랑자 사쿨루다위(Sakuludayi)도 붓다에게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질문을 했는 붓다의 대답은 명백했다.


"과거는 잠시 접어두자. 미래도 잠시 접어 두자. 내가 그대에게 법을 설 하겠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불교의 연기라는 교리이다. 그런데 이것이 불교의 중심 개념인 사성제의 토대를 형성 한다.

[붓다의 옛길, 삐야닷시 스님, 번역본]
보성(寶聖) [2014-08-30] : 구제님, 이번에는 꼭 읽어보고 댓글 다시오!.
보성(寶聖) [2014-08-30] : 읽어 볼까???
법광(法光) [2014-09-01] : 고통은 우리 자신이 만들며 또한 소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신은 인간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상에 불과합니다. 지금이 청정하면 과거, 미래 모두 청정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보성거사님 _()_
보성(寶聖) [2014-09-02] : _()_ 법광 거사님께 두 손 모읍니다.
wndtodrnwp [2014-11-15] : 당신의 말을 하세요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그것이 불법의 공부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 첫 길을 갈수가 있다.
wndtodrnwp [2014-11-15] : 보성아 너 아직도 똘만이가 참 한심하다 어찌 그리하노 차라리 머리를 깍아면 경전 보다 좋을 거야 머리를 깍으면 단번에 합장이 올라온다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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