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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례의 문제와 개선방향 / 명법(옮긴글)
법광(法光) 2015-02-22 08:36:27, 조회 : 772, 추천 : 0
불교의례의 문제와 개선방향 / 명법
특집 | 불교의례 이대로 좋은가



1. 들어가는 말

불교의례의 개혁에 대한 논의는 구한말 이래 계속 제기되었던 논의이다. 그럼에도 불교의례 개혁에 대한 논의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원점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의례 개혁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불교의례와 관련하여 제기되었던 한국불교의 근대화가 근대를 지나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까지 유예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지부진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표면적으로 볼 때 불교의례 개혁에 대한 반대 의견은 잘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의례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이처럼 뜨뜻미지근한 불교계의 반응 속에서 조선시대에 시행되었던 불교의례가 큰 변화 없이 21세기까지 계속 시행되고 있다.
불교계 일각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기존의 불교의례가 계속 시행되는 가장 큰 이유는 실제로 불교 현장, 즉 사찰에서 전통적인 의례 때문에 문제가 되거나 불이익을 겪은 일이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전통의례는 지금까지도 사찰 경영에 가장 중요한 통로이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의례로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는 징후가 도처에서 포착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종교에서 불교의 위상이 점차 약화되고 신도가 줄어드는 현상은 전통의례를 포함하여 불교계에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관습적으로 실행되는 여러 가지 관행들이 실제로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처럼 한국불교의 자기 성찰은 자기 문제의 인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의례 개혁 논의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지 못한 것도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문제 인식의 피상성이 문제를 대처하는 태도의 안일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기되었던 의례 개혁 논의는 근대주의적 입장에서 원칙론을 천명했을 뿐, 한국불교가 처한 역사적인 현실이나 현대사회에서 불교의례가 담당해야 할 기능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그런 까닭에 일부 지식인들과 승려들이 제시한 불교의례 개혁론은 대중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논의만 무성한 채 끝났다.

다행스럽게도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던 불교의례의 한글화도 최근 승가교육 개편과 더불어 부분적으로 진전을 보이고 있다. 2013년 3월 조계종 교육원에서 발간한 《불교상용의례집》은 조계종 승가교육 교제이지만, 불교계 전반으로 확대 시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편찬된 것이다. 승려교육의 첫 단계부터 한글 의례를 교육함으로써 세대교체를 통해 한글 의례를 보급하려는 의도는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새로 출판된 의례집은 기본적으로 《석문의범》에서 정형화된 불교의례를 한글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의례의 현대화라고 하기 어렵다. 또한 승가교육제도의 개편 과정에서 보았듯이 실제 새로 제정된 한글의례를 사찰 현장에서 시행하기까지 많은 반발과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의례는 승려뿐 아니라 신도들까지 관련된 것이며 오랫동안 익은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의례가 자리 잡기까지는 승가교육 개편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불교 근대화의 담론에서 불교의례 개혁은 빠지지 않고 등장할 만큼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그러나 현장에 다가가 의례 개혁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기존 논의와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변화를 담보하지 못할 것이다. 의례 개혁은 불교계 전체 개혁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불교계 전체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2. 종교의 사사화(私事化)와 한국불교의 현실

개항 이래 급격한 변화를 거친 한국사회의 여러 분야 가운데 종교 역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른바 기독교의 유입과 성장, 그리고 유교, 샤머니즘 등 전통종교의 퇴조로 요약되는 한국 근대의 종교 상황은 21세기 들어 새로운 변화의 징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다름 아니라 종교의 사사화(privatization)라는, 서구에서 근대화와 더불어 나타난 종교 현상이 한국사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서구에서 근대화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근대화는 곧 세속적인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 결과 공적인 영역에서 기독교의 약화되었는데, 이 현상을 ‘세속화’라고 부른다. 세속화는 영원한 것으로서 의미를 지녔던 것을 시간 속에서 생성되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세계 내로 가져오는 것이며, 신앙이 중심이 되었던 삶에서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삶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화의 결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여러 분야가 종교와 분리되었다.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로부터의 이민을 통해 서구사회가 다인종, 다종교사회로 전환되면서 종교는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라 상품을 선택하듯 자신의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종교는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 원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로부터의 이탈을 가속해 서구사회의 탈기독교화를 가져왔다.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종교, 특히 기독교는 공론의 장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주관적 신앙의 형태로 사적인 공간에 머물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제도종교에 소속되지 않은 채 개인적인 차원에서 종교를 소비하거나, 특정 종교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제도종교 바깥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영적인, 그러나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으로 일컬어지는 현상이 현대 종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사화’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의 원인에 대하여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전통종교의 전횡성이 해체되면서 신도층의 충성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사회의 다원화와 다원적인 상황이 시장원리에 의해 유도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와 달리 근대화가 곧 서구화를 의미했던 한국사회에서 서구문화 전파의 전위대였던 기독교는 근대화 과정에서 신도 수의 증가와 교회의 대형화 등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이런 성장은 개화 이래 한국사회의 발전에 기독교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서구의 과학기술과 경제, 정치제도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던 결과이다. 서구와는 달리, 기독교는 근대화와 더불어 한국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다.

그런데 영원히 성장할 것만 같았던 한국 기독교 교회에 최근 들어 신도의 이탈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서양에서 근대 이후 나타났던 종교의 사사화 현상이 포스트모던 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 전통종교인 불교는 조선시대 이래 공적인 영역으로 진출한 적이 없다. 중국 송 대 이래 신유학이 사회를 지배하는 전일적 가치체계가 된 이후, 불교를 비롯한 도교 등 다른 종교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축출되어 사적인 영역으로 격하되었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수용한 조선시대에서 불교는 부녀자들의 종교로 전락했다.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된 근대 이후에도 불교는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 채, 식민지배와 해방, 그리고 6·25전쟁 등 역사의 격동에 휘말려 들어갔다.

불교는 근대화 과정에서도 한국사의 변화를 주도하기보다 그것을 뒤쫓기도 벅찼으며 정치권력의 세속적 힘에 의해 불교계의 변화를 강제 받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최근까지도 불교는 공적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역량을 확충하지 못하고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사적인 영역에서조차 한국불교는 교세를 확장하지 못하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제1종교의 자리를 개신교에 내주게 되었다.

더욱 치명적인 사실은 사적인 영역에서 불교의 종교적 기능이 개인적 문제의 기복적인 해결에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종교는 근대화 과정에서 초월적인 것에 대한 신앙을 세속적인 합리성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물신숭배와 결탁하여 더욱더 비합리적인 것이 되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지만, 불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근대화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시대에 뒤진 낙후하고 열등한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전통적인 불교의례는 바로 조선시대 이래 계속되었던 신앙의 형태인 기복과 관련되어 성립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 불교의례의 문제가 존재한다.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경험은 우선적으로 궁극적인 실재나 의미와의 개인적 만남”으로 간주된다. 개인적인 가치와 의미 체계를 소중히 여기고 개인의 경험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는 개인주의적 세계관은 주관적인 삶의 방식을 강조하기 때문에 종교에서도 주관적인 체험을 통한, 이른바 ‘영성’의 추구에 관심을 갖는다.
한국사회에서도 종래의 제도권 종교의 교리적 도그마나 권위를 부정하면서 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영성’을 추구하는 종교의 사사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 종교의 사사화 영향으로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이 대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사회에서도 불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은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현실적으로 제도종교로서 불교가 그에 제대로 부응하고 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서구에서 일어난 불교에 대한 관심은 아시아에서 제도종교로서 정착된 형태보다 서구에서 뉴에이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된 불교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상과 심리치유에 관심을 가질 뿐, 전통 불교의례에 온축된 상징적 의미체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수입된 새로운 스타일의 불교에는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의례가 설 자리가 없다.

현대사회에서 제도종교로서 한국불교가 실천하는 종교 활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간화선 수행이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불교의례를 통한 불공, 기도, 천도의례 등의 활동이다. 한국의 참선수행법은 현재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명상붐과 부응하는 불교전통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실제 미국에서의 숭산 스님 성공은 그러한 기대가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최근 한국불교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외국에서도, 국내에서도 간화선의 위상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러므로 숭산 스님의 성공이 예외적인 것인지, 미완의 것인지 판가름하기 어렵다.

간화선의 수행 방법 자체가 대중화하기 쉽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제약으로 작용했지만, 간화선 퇴조를 불러온 더 큰 원인은 제도권 불교의 배타적인 태도이다. 전통 선원에서 하안거와 동안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간화선 수행은 일반인들에게 어렵고 힘든 수행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들어 일반 신도에게도 일부 선원이 개방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간화선 수행은 출가수행자 그룹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명상 붐이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 간화선 선양을 위한 절호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평소 ‘최상승’이라고 자랑했던 선승들의 자부심은 오히려 간화선의 대중화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 밖에도 여전히 불친절한 참선 지도와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선의 언어 또한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간화선은 심지어 출가수행자에게도 외면당하고 있는데, 안거 기간, 선방에서 수행하는 납자들 가운데 간화선 수행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선참 선사들의 우려는 간화선의 위기가 상당히 심각함을 말해주고 있다.

둘째, 불공, 기도, 천도의식 등 전통불교의례는 기본적으로 사찰에서 승려들이 행했던 출가수행자들의 의례지만 이른바 “신도 단련”이라고 일컬어지는, 재가불자들의 사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서비스의 하나로도 시행되고 있다. 탁발이라는 의례가 사라진 근대 한국불교에서 그것은 사찰 경영을 위한 재원을 공급하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통의례 역시 일반 신도들에게 매우 불친절하다. 복잡한 절차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는 초심자뿐만 아니라 오래 절에 다닌 신도들에게도 암호와 같다. 불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조차 불교에 대해 가장 곤란을 느끼는 것은 전근대적인 의례이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적 전통에도 익숙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불교의례는 더욱 낯설다. 그들은 복잡하고 권위적인 사찰의 예법이나 형식적인 의례보다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원하기 때문에 아예 사찰에 접근하지 않거나 설사 발을 들여놓았더라도 전통적인 의례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변화의 체험이지 어떤 권위에 의해 주어진 교리를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초월적인 존재나 상징체계를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미에 접근할 수 없는 형식화된 의례는 현대인들의 종교적인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탈근대적 종교 현실에서 제도적 권위에 근거하는 의례는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불교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모두 전통적인 불교의례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추구하는 개인적인 종교체험을 하기에 전통적인 불교의례는 너무 먼 곳에 있다. 더구나 한자어로 진행되는 불교의례는 집전하는 승려에게도, 참여하는 신도에게도 공명을 일으키지 못한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한자는 영어보다 더 어렵기 때문에 설사 그 의미를 배워서 알고 있더라도 실제 의례 진행 과정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기가 쉽지 않다. 전통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가치평가가 되고 있지만, 전통 의례는 비합리성과 소통 불능,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상징들 때문에 현대인에게 접근하기 어렵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의례의 생명은 자발성과 경건함에 있음에도 지나치게 긴 의례도 집중도를 떨어뜨려서 의례를 거부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조용하고 엄숙하게 치러져야 할 의례가 소란스럽고 산만하며 질서정연하지 못하며 무속의례와 유사한 분위기 때문에 전근대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불교의례는 자기 성찰과 깊은 무의식과의 접촉이 발생하는 통로이다. 현행 의례로는 그런 종교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 결과 정작 제도종교로서 불교는 불교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는 젊은이들을 효과적으로 포섭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명상, 요가, 단학, 국선도 같은 비제도권적 종교나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법이나 자비명상 수행법, 그리고 서구에서 심리치료와 명상을 결합하여 만든 MBSR, MBCT와 같은 프로그램을 찾아다닌다. 한국 기독교는 교회를 떠난 뒤에도 신도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불교는 불교에 호감을 갖는 사람조차 사찰에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서 배회하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말해 참선이든 의례든 불교는 매우 불친절한 종교이다. 그것은 수행과 의례를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둠으로써 종교적 권위를 유지하려는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는 오랜 세월 공적 영역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결과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탓인지 알 수 없지만,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과 불교 종단에 대한 불신과 함께 오늘날 불교 인구가 감소하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3. 전통 불교의례의 문제와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

전통 불교의례의 문제는 전근대적인 언어와 형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후 한국불교 의례는 실질적인 변화 없이 외형상 동일한 형식을 유지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상당히 많은 변화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변화는 의례의 형식보다 의례가 집행되는 행태, 즉 관행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는 불교의례가 사찰의 경제적 수입이 발생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의례의 전근대적인 형식보다 더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전통 불교의례는 그 전근대적 형식보다 그와 관련되어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한국불교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신도 단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불교의례는 신도 개인이나 가족의 복을 구하거나 조상을 천도하는 등 사적인 일과 관련되어 있다. 농경사회에서 불교의례는 음력 초하루, 초삼일, 관음재일, 또는 절기나 명절, 불교 명절 등 특정 날짜에 맞추어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특히 도심사찰에서는 이와 같은 정기적인 불공의식 외에 백일기도 등 새로운 양태가 등장했다. 한국사회의 입시 열풍에서 시작된 대학입시 백일기도가 하안거와 동안거 기간에 행해지는 백일기도로 확대되어, 현재 도심사찰에서는 거의 일 년 내내 기도가 행해지고 있다. 백일기도는 의례 형식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불공의례를 상시적으로 행한다는 점에서 정기적으로 또는 특정 날짜에 행해졌던 전통적인 신행 양태와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신도의 요청이 있을 때 행하던 방식에서 미리 기도 동참자를 모집하여 행하는 사찰 단위의 행사로 바뀌었다. 사찰에 따라서는 백일기도 회향 때 행해지던 천도재를 백일기도 중 7일마다 행하기도 한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기도도량이나 대도시 도심포교당을 중심으로 행해졌던 이와 같은 관행이 현재 조계종에 소속된 거의 대부분 사찰에서 시행되고 있다. 그 결과, 과거에는 사찰에서 승려들의 일과로 행해졌던 불공의례가 신도들을 위한 기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의례 실천 방식의 변화는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사회적 모순의 격화 등 한국사회의 근대적인 변화는 빈부의 차, 물신숭배, 경쟁의 격화와 인간성 파괴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을 야기했다. 공적인 영역에서 그 해결을 기대할 수 없었던 개인은 사적인 영역, 특히 종교에서 해결책을 구했다. 대학입시를 비롯한 국가고시, 입사시험, 그리고 최근의 취업난까지 팍팍해진 삶의 조건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합리적인 해결보다 초월적인 힘에 의존하는 심리를 만연하게 했다.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기복신앙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으며 불교계는 기존의 불공이나 천도의례를 활용한 백일기도, 천도재, 예수재, 참회기도 등으로 이에 반응했다. 이것이 근대화 시기 한국종교의 발전을 설명해준다.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도 근대화의 수혜자이다. 상시화된 기도는 천도재와 더불어 사찰의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었다. 불교는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더불어 상업주의적인 변용이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전통 불교의례는 더욱더 공고해졌다.

이와 더불어 전문적으로 의례를 집전하는 승려가 등장했다. 과거에 사찰에 상주하는 승려들이 번갈아가며 맡았던 부전 소임이 특정 승려의 소임으로 전문화되었으며, 사찰에서 행해지는 일과의 하나였던 전통 불교의례가 상시적인 신도 단련의 수단으로 바뀌었다. 백일 동안 하루에 세 차례, 또는 네 차례씩 매번 1시간 반에서 2시간, 때로는 3시간 이상 소요되는 기도는 웬만한 체력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그뿐 아니라 각종 명목으로 열리는 천도의례까지 맡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일과 병행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외부에서 특별히 기도를 전담해 줄 승려를 고용하게 되었으며 대형 사찰에서는 여러 명의 기도부전을 고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의례가 전문적인 승려에 의해 장기간 행해지다 보니 그야말로 형식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신도들은 의례 본래의 목적인 의식의 정화와 깨달음, 또는 성스러움이나 경건함을 체험하지 못한 채, 타성적으로 의례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의례에 직접 참가하지 않아도 기도금만 보내면 사찰에서 대신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대리로 행해지는 기도는 오직 복과 영험에만 관심을 가질 뿐, 의례에 참석할 때 얻을 수 있는 종교적 체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늘날까지 불공과 기도는 승려와 재가자가 관계 맺는 방식의 하나이다. 그러나 형식적이고 타성적인 기도는 승려와 재가자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현재 행해지는 의례를 통해서는 신도들이 승려들로부터 법과 법을 구하는 정진의 힘과 어려움을 감내하는 확고한 수행의 정신을 배우기 어렵다. 당연히 신도들의 신심이 확고해지거나 내면적인 성숙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이런 관례를 통해서는 승려와 재가신도 사이의 신뢰는커녕 피상적이고 일회적이며 도구적이고 소외된 관계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발성이 결여된 기도는 승려들에게도 문제를 만들고 있다.

신도를 대신하여 행하는 기도가 보살정신에 바탕을 두지 않고 물질적인 대가만 바란다면 결코 수행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 기도는 의무적인 것이 된다. 또한 사찰 경영을 의례에 주로 의존하는 한국사찰의 운영 방식은 구조적으로 승려들의 관심을 한정시킨다. 염불의례는 익히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익히면 특별한 노력 없이도 사찰을 경영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수행이나 신도를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게 된다. 또는 상시적으로 행해지는 기도와 제사, 신도관리 때문에 법문을 준비하거나 자기발전을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목회 때마다 설법을 준비하는 목사들과 비교해볼 때 대부분의 승려들은 법문 준비에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외부로부터 자극도 내면적인 성찰도 없이 승려들이 자칫 무사안일 빠지기 쉽다.

신도들 역시 승려들에게 바라는 바가 좋은 염불소리와 영험이기 때문에 승려들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의례는 개인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신도를 수동적인 객체로 만든다. 이처럼 목적지향적인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승려들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듯하지만, 실은 불교와 승려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불교가 점점 현대적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 자발성과 주체성이 사라진 형식화된 의례는 현대인들이 종교에서 얻고자 하는 내면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례 개혁은 상업주의를 극복하고 자발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4. 의례 개혁의 방향과 방법-근대주의를 넘어서

의례 개혁에 대한 숱한 논의가 있었지만 이 논의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불교계 내외의 상황 변화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변화는 출가자의 감소이다. 종교의 사사화 영향으로 출가하는 사람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출가 나이도 점차 고령화되고 있다. 이제는 출가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번거롭고 어려운 출가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동시에 조계종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엄격한 위계, 전근대적 질서, 승려들의 비도덕성과 의식의 후진성, 승려 생활의 고달픔 등이 출가자 감소의 중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출가자 감소는 후속 세대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제도종교로서 불교의 몰락을 의미한다.

출가자의 감소는 앞으로 한국불교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이다. 적은 수의 출가자들이 지금까지 승려들이 담당했던 수많은 의례 집전과 수행, 사찰 경영을 모두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상당 부분을 재가자에게 넘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의례 부분은 재가자에게 의식집전을 맡길 것인지, 아니면 의례를 간소화하여 승려들의 부담을 덜고 재가자도 참여하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포교사나 재가전문가를 두는 방식은 불교의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사사화로 인한 여러 가지 종교 행태의 변화는 기존의 의례가 작용할 수 있었던 환경을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형식을 그대로 두고 집전하는 사람만 바꾸는 것으로는 불교의 발전을 도모하기 어렵다. 불교의례는 더욱더 생활에 밀착되어야 한다. 재가자들을 훈련시켜 의례를 맡기기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의례를 만들어 생활 속에서 실천하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사사화’는 제도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우려스러운 현상이지만, 그 자체로 본다면 부정적이지 않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 체험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엄격하게 제도적이지 않은 불교가 이 시대의 요구에 더 적합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지금과 같은 방식의 의례가 가능한지, 의례를 통해 불교는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 참여자들의 내면적 변화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또 위에서 지적한 전통적인 불교의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방안이 필요한지에 대하여 성급히 결정하기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서양에서 나타나고 있는 “종교의 귀환”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이성과 계몽의 결과로 합리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할 줄 알았던 서양 근대의 기획이 좌절되고, 현대사회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인한 공동체의 파괴와 이로 인한 상실과 의미 부재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근대적 이성의 한계를 경험한 서양에서 사회를 통합하고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로서 종교에 대한 요청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도 계몽의 가치를 철저히 신뢰했던 하버마스의 입장 변화는 전통과 현대, 비합리성과 합리성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불교계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는 민주사회에서는 사회를 통합하고 제도를 만들어내는 종교의 기능이 세속화된 의사소통적 이성에 이관되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바꾸어 근대적 이성의 오만을 경고하면서 건강한 사회를 위해 종교적 담론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서구사회의 세속화의 부작용과 한계에 대한 처방으로, 합리성을 위해 신앙을 버릴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 지식과 신앙의 상보적인 관계를 요청하고 있다.

최근 한국 종교계에서도 서구에서 오래전에 나타났던 세속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동시에 “종교의 귀환”도 일어나고 있다. 두 과정이 혼재되어 압축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은 문제해결을 위한 전망도 제공해준다. 이 가운데서 한국불교의 문제와 그 극복의 방향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교에서 깨달음과 대승불교의 상징체계의 관계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지만, 현재 세속화와 동시에 전근대적인 종교의례가 혼재하고 있는 한국 종교 상황에서 근대주의적 개혁론이 폐지하기를 주장한 대승불교의 상징체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불교의례가 불교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불교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불교의례가 온축하고 있는 가치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 경험의 축척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린 세속화 이전의 가치들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상징들을 전적으로 폐지하기보다, 오히려 의미의 상실이 가속화되는 현대사회에 그 상징들이 보존하고 있는 초월적 의미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것은 전근대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속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을 치유하기 위해 잃어버린 종교적 원천을 불러내고 그것을 통해 의식의 고양과 파편화된 사회를 통합하는 수단으로 삼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태의연한 전통적인 의례로는 불가능하다. 사사화되는 종교 환경에서 불교전통의례가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내용에 대한 접근의 차단이었다. 특히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행해지는 의례는 개인의 내적 체험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대승불교의 상징체계를 일상용어로 풀어쓰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기존의 의례집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현대적인 상징 해석을 통해 일상 언어로 된 의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경건성과 의식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기존의 개혁론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첫째, 불교의례는 일반인들이 어려움 없이 이해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한글화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특수한 몇몇 불교용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일상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과감하게 과거의 틀을 버리고 간소하면서도 종교적 경건함과 깊이가 있는 불교의례를 제정해야 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언어로 되어 있지만 아름답고 시적이며 운율에 맞아야 하며 특별한 훈련이 없이도 따라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동시에 참여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쉽고 너무 길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종교적 체험을 자기화할 수 있을 만큼 불교의 핵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사사화된 현대사회에서 대승불교의 상징체계를 내면화할 수 있는 시적이고 현대화된 새로운 의례문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둘째, 의례의 간소화가 필요하다. 근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동일하지만 이 주장의 배경은 다르다. 현대인들의 바쁜 삶에서 의례만으로 일관되는 법회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법회 중에 법문과 개인적 성찰의 시간이 더 많아져야 하며 따라서 의례는 그만큼 간략해져야 한다. 그냥 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줄인 만큼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

또한 여러 가지 의례를 동시에 진행하거나 법문과 혼용하지 말고 각 부분들이 질서 있게 조화되는 일관된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의례를 다 진행한 다음, 다시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법회를 여는, 일원화되지 못한 의례는 의례의 일관성과 집중도를 떨어뜨리게 된다.

한용운이 주장했던 것처럼 석가모니불 한 분만 모시고 반공(飯供) 대신 법공(法供)으로 바꾸는 것도 이제는 가능한 일이 되었다. 사실 현재 한국불교계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여러 전각이 있어도 각 전각을 담당하는 부전을 두어 공양을 올리거나 기도를 하지 못하고 관리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새로 건축하는 사찰에는 대웅전 하나만 짓는 예가 흔하다. 관리의 어려움도 있지만 대웅전을 크게 건축하면 더 많은 신도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출가자 감소라는 현실은 원치 않아도 이런 경향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요청은 한용운의 주장과 달리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적 필요 때문에 제기된 것이며 따라서 대승불교의 상징체계를 거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상징체계를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필요한 부분을 선택하여 현대화하자는 것이다.

셋째, 일상의례를 개발해야 한다. 불교의례는 기본적으로 승려들이 집전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사찰 외부의 다른 장소에서는 적절하게 시행할 수 없으며 승려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없다. 그 결과 승려가 의례가 필요한 모든 곳을 쫓아다니거나 아니면 불교의례를 거행하지 않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수행과 교화를 한 사람의 승려가 다 해내기는 쉽지 않으며 그렇다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해결 방안은 승려가 집전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의례를 개발하여 신도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의례는 특별한 훈련이 없어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워야 하며, 불교 신도가 아니어도 할 수 있도록 범음이 아니라 평음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훈련이 필요한 목탁이나 요령보다 더 간단한 법구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이득은 불교의례의 확대보급이다. 개신교의 기도는 가정이든 공공장소든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행할 수 있는 반면, 불교는 목탁과 요령, 향, 초, 좌복을 갖추어야 하며 종교 상징물도 필요하다. 승려가 집전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절차도 번거롭고 인원도 많이 동원된다. 불교의례를 초보자도 집전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면,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고 생활 속에서 응용할 수 있다. 식사시간이나 간단한 행사에도 응용할 수 있고 또 가정이나 공공장소에서도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먼 곳이 아니라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에서도 수행할 수 있을 때, 불교의 대중화에 한 걸음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간편화가 현대인들의 편의만 쫓아서는 안 된다. 의식의 간소화와 일상용어의 사용은 더 깊은 종교적 체험을 위한 것이지 바쁜 현대인을 위한 인스턴트 의례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사화된 종교는 많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 불교수행은 지금 현재 체험하지 못했지만 장차 체험될 수 있는 것으로 자신 한계를 확장해가는 일이다. 체험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을 그것에만 한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수행이 자기 확장과 성장의 계기가 되려면 체험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례에 나타나는 상징들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근대주의자의 개혁론과 최근의 초기불교 옹호자들의 대승불교 비판이 불교의례에 나타난 대승불교의 상징체계에 집중되고 있지만, 현대사회에 필요한 자기 성장과 확장의 계기로서 통합적 사유를 함양하는 데 대승불교의 상징적 세계질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의미의 부재와 파편화된 인간관계로 고통받는 포스트모던의 한국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불교의례는 이와 같이 자기 성장을 위한 새로운 의미체계를 제공한다. 따라서 형식을 바꾸는 것보다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향에서 불교의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발전과 개인의 구원이라는 두 가지 대승불교의 목적에 합당한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도 불교의례의 변화 방향이 그렇게 틀지어져야 한다. 물론 전통적인 불교의례를 통해서도 그와 같은 경험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제한된 인원에게만 가능한 것이며, 그 때문에 그 소통불가능성 속에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이 개입해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근원과의 접촉이 차단되고 있다.

불교의례는 불교적 체험의 정수이며 불교 상징체계의 결정체이다. 동시에 종단의 여러 가지 모순과 사회의 문제들이 모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변화의 징후는 너무나 명백하다. 변하지 않으면 예상보다 빠른 시기에 불교는 소수 종교로 몰락하고 말 것이다. 현대적인 종교 상황의 변화를 잘 관찰하면서 불교적 가치와 정신을 보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 ■



명법
조계종 교수아사리.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미학의 역사》(공저) 《미국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등과 〈서양 현대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등 논문 다수가 있다. 현재 서울대·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과 겸임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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