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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종교성
법광(法光) 2016-08-20 09:54:23, 조회 : 447, 추천 : 0

7장 불교의 종교성(宗敎性)에 관해서

마스다니 저, 홍사성 번역

 

불교의 종교성에 대한 의문

지금까지 나는 부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정밀한 인간음미에 관해서 말하였다. 또 인간의 의지처로서의 법과 삼보에 관해서 가장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신()이니 기원(祈願)이니 기적(奇蹟)같은 것에 관해서는 아직 한 번도 설명한 일이 없다. 아니 결국 그러한 것은 언급할 겨를도 없이 이 한권의 책은 끝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러한 가르침이 과연 종교일 수 있을까. 혹은, 그러한 가르침이 종교인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가 있다 하여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유럽의 학자들이 전세기(前世紀)에서 금세기에 걸쳐 불교에 관해서 겨우 그 진상(眞相)을 알기 시작하였을 때 그들도 또한 그와 같은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후세의 불교에 관해서는 그 종교임을 인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근본불교(根本佛敎=초기불교)에 관해서는 그 종교성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근본불교는 종교를 무시한다’라고도 말했다. 또 어떤 학자는 ‘불교는 처음에 기도(祈禱)가 없는 도덕적 조직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그 후에 종교가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의견들은 오늘날 이것을 뒤돌아 볼 때 퍽 흥미 있는 점이라고 하겠다.

 

그들이 불교 특히 근본불교의 종교성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종교관이 기독교적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게는 그 껍질에 맞도록 구멍을 판다고 한다. 기독교의 강한 영향 밑에 있었던 그들은 당연히 기독교의 영향 밑에서 그 종교관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란 ‘신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틀 안에서 모든 종교를 규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들 앞에 그 전모(全貌)를 드러낸 동양의 위대한 가르침은 아무리 하여도, 그들의 종교관의 틀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황하였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과 같은 흥미 있는 설명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있어서 일반적 종교관은 어떠한가 한 번 생각해 볼 때, 여기에서도 ‘신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테두리 속에서 모든 종교를 규정하려는 사람이 있으며 또 더 막연하게 무언가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기적(奇蹟)이나 기도(祈禱)나 주술적(呪術的)인 의식 속에 종교의 종교다운 이유를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교가 그 본래의 모습을 명백히 하면 할수록 ‘불교의 종교성’에 대한 의문이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이유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도 또한 성()스러운 것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에 관한 학()의 영역(領域)에 있어서는 사정은 크게 변화하였다. 기독교 이외에는 종교에 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적었던 유럽의 학자들 앞에 많은 종교에 관한 지식이 급속도로 모여졌다. 그들은 ‘신과 사람과의 관계’와 같은 오래된 종교관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않는 종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교적 대상은 어떠한 뜻에 있어서 인격적 존재이다 하는 사고방식이 결코 모든 종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그러면 도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학자들은 또 다시 한번 이 물음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낮은 것은 미개원시(未開原始)의 종교에서 높은 것은 기독교나 불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에 관해서 무언가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는 있지 않은가를 탐구 하였다. 그 결과 학자들이 마침내 찾아낸 것은 소위 ‘성스러운 것(das Heilige)’이라는 말로써 우리들이 표현하고 있는 그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동양의 위대한 가르침인 불교도 또한 분명하게 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지적하였다. 예를 들면 프랑스 사회학파의 뒤르껭은 ‘성스러운 것’에 관한 신념과 행사(行事)와 공동사회가 종교의 본질적 요소임을 말한 후에 이렇게 말한 것도 그 지적의 하나였다.

 

“불교가 어떤 연유로 종교인가 하는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다. 즉 그것은 신은 없지만 성스러운 것의 존재 네 가지의 성제(聖諦)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행사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쉐델브롬은 삼보귀의를 지적하면서 ‘부처님이 인생의 황야(荒野)가운데서 존재의 불행과 고뇌에서 떨어진 오아시스를 발견하였다는 것, 거기에 마치 성스러운 것이 풍부한 내용과 함께 속()과 상대(相對)하고 있다’라는 것을 말하며 또 ‘불교는 하나의 종교일까’하는 이 오래된 낡은 문제는 ‘사람들이 스승의 대화(對話)와 규정(교법과 계율)속에 나타나 있는 저 역연(歷然)한 종교에 대한 감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의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흥미 깊은 말이다.

여하간 이렇게 하여 불교의 종교성의 문제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관념의 등장에 의해서 객관적인 학문의 문제로서는 일단 지금까지의 애매한 것에서부터 탈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단순한 객관적인 학문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주관(主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불교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것’이란 무엇인가. 또 그것에 대한 불교인의 의식(意識)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혹은 불교의 ‘성스러운 것’에 대했을 때 그것은 우리들을 어떻게 흔들며 움직이는 것일까. 도대체 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가르침이 우리들의 전인격(全人格)을 흔들며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주관의 문제로서의 불교의 종교성의 문제는 거기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란 올바름()이다.

불교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은 특정한 인격 관념 혹은 행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초전법륜(初轉法輪)에 있어서 설명된 부처님 교법의 근본형식은 사제설법(四諦設法)이었다. 그것은 사성제(四聖諦) 즉 ‘네가지의 성스러운 명제(命題)’라고도 불린다. 실천적 가르침으로써 보여준 팔정도(八正道), 즉 ‘성스러운 어덟 가지의 길’도 또한 성스러운 것이었다. 삼보에 관해서는 특히 성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형용사는 눈에 뜨이지 않으나 그 내용은 언제나 ‘성자와 성자의 법과 성제자(聖弟子)’라고 불려지고 있다.

 

더욱이 그 지()는 ‘성스러운 지’이며 그 율()은 ‘성자의 율’이며 그 소주(所住)는 ‘성스러운 주()’라고 표현되듯이 불교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은 그 교법과 실천과 공동사회(승가)의 거의 모든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불교에 있어서 ‘성스러운 것’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에 대한 답은 이미 예부터 많은 주소(註疏)가 일치하여 설명하고 있듯이 ‘성자정야(聖者正也)’ 즉 ‘성이란 올바름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불교에만 있는 ‘성스러운 것’의 독특한 해석 내용이다. 다른 종교에 있어서는 혹은 신적(神的)인 것에 성()이라고 불린다. 혹은 청정(淸淨)한 것이 성이라고 불린다. 혹은 지선(至善)을 성이라고 하는 것도 있으며, 또 혹은 기괴한 것을 성이라고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올바른 것()을 성()의 내용으로 삼는 것은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도 불교의 독특한 입장이 명백히 지적될 수 있다. 불교의 길을 가는 이는 미망(迷妄)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다. 환상(幻想)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전도(顚倒)앞에 귀복(歸伏)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불허(眞實不虛=진실하며 허무하지 않은 것)한 것 앞에 무릎을 꿇고, 다만 정리(正理)에 합당한 것의 앞에 귀복(歸伏)한다. ‘성()이란 정()이다’라는 것은 이러한 불교의 입장에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성은 정이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성스러운 것에 대한 우리들의 주관이, 만일 그런 것들을 단순한 지식 혹은 단순한 이론으로서 받아들일 때 그것들은 결코 우리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뒤흔들며 감동하게 하는 것은 될 수 없다. 도대체 불교가 갖고 있는 진실정리(眞實正理)의 가르침이 정말로 성스러운 것으로서 사람들의 온 인격을 감동시키며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떠한 방식에서 일까. 불교의 종교성의 문제는 거기에까지 파고 들어갔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해답이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나무(南無)의 심리(心理)를 분석하다

‘나무삼보(南無三寶)’라고 말한다. ‘나무(혹은 귀의)불’ 혹은 ‘나무법 나무승(南無法 南無僧)’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불교도가 성스러운 것에 대하는 태도는 오래전부터 ‘나무’라는 한 말로써 표현되어 왔다. 그러면 성스러운 것에 대해서 나무(南無)한다는 것은 어떤 의식으로써 또는 어떤 태도로써 그것에 대한다는 뜻일까.

 

나무란 잘 알려져 있듯이 범어(梵語) 나마스(namas)의 음역(音譯)이며 의역(意譯)하여 ‘귀명(歸命)’이라고 말한다. 그 원래의 뜻은 몸을 굽히며 머리를 숙인다는 정도의 뜻에 불과하지만 후대의 주석자(註釋者)들은 다시 이 굴신정례(屈身頂禮)의 외면적인 태도를 내면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여러 가지의 해석을 시도(試圖)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해석은 ‘귀투신명(歸投身命=신명을 귀투한다)’이라는 해석일 것이다. 신명이란 온 인격을 다한다는 뜻이며 귀투란 돌아가는 듯이 던지며 의지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전인격적(全人格的)으로 빙의(憑依)한다는 뜻이다. 무엇에 매력을 느낀 듯이, 혹은 끌려 들어가듯이, 온 인격을 털어서 삼보에 귀투한다. 그때 우리들은 비로소 삼보에 나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번역으로서 나무에 경포(驚怖)의 요소가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은 반드시 대표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무에 관해서 이러한 주석을 시도하는 사람은 별도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한 예()로서 우리는 천태대사(天台大師)의 《법화문구(法華文句)》에 나오는 《오계경(五戒經)》에 관한 해석을 듣고자 한다.

 

“나무(南無)는 오계경에는 ‘두려움’이라 부른다. 두려움이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신다. 생사험난(生死險難)의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 매우 주목할 만한 주석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성스러운 것에 대할 때 반드시 이러한 놀라움()과 두려움()의 의식이 우리들 마음속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교법(敎法) 앞에 떨면서 서다

나무(南無)에 있어서의 경포(驚怖)의 의식, 이런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 암시(暗示)해 준 것은 루돌프 옷토의 명저(名著)《성()스러운 것(Das Heilige')》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성스러운 것에 대할 때에 자기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의식을 정밀하게 서술한다. 의식의 여러 가지 요소를 검출(檢出)하고 있지만 그중에도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요소는 ‘두려워하면서 보고 있는 것’그리고 ‘매력을 느끼는 것’이라는 두 개의 서로 모순되는 요소였다. 이러한 것은 모든 종교사(宗敎史)와 종교심리학(宗敎心理學)의 지식이 동의(同意)하며 또 지지(支持)하는 바이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건대 불교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것’에 대한 태도, 즉 나무(南無)의 의식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귀명(歸命)과 그리고 경포(驚怖)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인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리(正理)에 합당하며 진실하며 허()하지 않는 교법이었다. 그러한 교법에 따르는 것이 어떻게 하여 종교일 수가 있는가라고 사람들은 의심한다. 그러나 예를 들면, 모든 것은 무상이다 라고 가르치는 교법 앞에 서서 그러한 것이 마음깊이 납득되었을 때 우리들은 과연 마음이 평정(平靜)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들이 서 있었던 막연한 상정(常情)의 입장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만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세계와 인생의 정경(情景)이 거부할 수 없는 진실과 함께 우리들 앞에 전개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과연 아무 놀라움도 아무 무서움도 조금도 몸을 조이는 듯한 생각도 없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또 예를 들면 부처님은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고()이다 라고 가르친다. 만일 이러한 것이 진실로 이해되었을 때, 우리들은 여전히 천연스럽게 이 고()의 진리 앞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이제까지 날마다 즐거운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왔다. 그러한 상식의 입장은 이제 가루처럼 깨어지고, 무서운 인생의 진상이 명백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그때 여전히 태연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과연 이 교법을 진실하게 이해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무(南無)는 경포(驚怖)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의식의 움직임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움직임으로써 상대(相對)할 때 성스러운 교법이 비로소 우리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며 전인격(全人格)을 흔들어 일으키게 된다. 성스러운 교법이 정말로 성스러운 교법으로써 작용하며 성스러운 지혜가 정말로 성스러운 지혜로써 우리들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이때이다.

 

더욱이 이러할 때 진실불허(眞實不虛)하며 정리(正理)에 합당한 교법은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써 우리들을 끌어당긴다. ‘이 가르침을 놔두고서는 의지할 곳이 없다’면서 붓다의 교법 앞에 신순귀의(信順歸依)의 고백(告白)을 한 제자들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귀투신명(歸投身命)의 모습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불교에 있어서의 종교성의 문제는 나무에 있어서의 경포(驚怖)와 귀명(歸命)에서 그 초점을 찾아 낼 수가 있다. 이 두 개의 요소 중에 귀명에 관해서는 모든 주석자(註釋者)들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경포에 관해서는, 이것을 설명하는 이가 퍽 드물었다. 거기에 불교의 종교성에 관한 큰 맹점(盲點)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교법을 단순한 지식으로써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불교는 결코 종교가 되지 않는다.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진상을 단순한 말로써 운운(云云)하는 자에게는 불교는 결코 종교로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제행무상의 도리 앞에 살을 에이는 듯한 생각으로서 설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 앞에 불교는, 비로소 진정한 종교로서 나타날 것이다. 또 이러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삼보의 앞에서 그 모든 인격을 다하여 귀투(歸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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