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head9.jpg
Home 방송안내 신행생활 음악수필 불교강좌
 
  운영자인사
  운영자소개
  방송시간표
  생방송듣기
  방송대화방
  윈앰프설치
  사이버연등
  후원금보시

무창포불교대학


  인사하는 도반의 공간

 명성황후
常不輕菩薩 2015-04-08 13:41:16, 조회 : 1,459, 추천 : 0


명성황후는 우리 조선이 500년 역사의 종말을 보는 마지막 비극이며 한(恨)스런 사건의 여주인공입니다. 그녀는 민비로 조선을 마지막 구하려는 작은 방파재로 몸을 던졌다가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임오군란 때 죽임을 당할 뻔 했고, 그녀의 명석한 두뇌로 청(淸)나라와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주변 3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지키려다 결국은 힘의 논리로 희생된 비운의 여인이다.

그녀의 한계나 흥선 대원군의 모자람은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당시 무능함이다. 대원군도 정조의 죽음 이후로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로 나라가 피폐된 것을 구하려고 외척들의 세도정치의 뿌리를 끊고, 왕권 회복을 위해 경복궁을 중건(重建)하려다 나라의 재원을 탕진하여 당시 대원군이 국제정세를 몰라 쇄국정치라는 악수(惡手)를 두었다. 대원군도 초기에 쇄국을 하려고 하지는 안했으나 내치(內治)의 한계로 그리 택했다.

민비도 처음에는 자기가 세도정치의 모순을 막기 위해 택함을 받은 시아버지 대원군과 맞서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첫 아이의 죽음 이후로 원수관계가 되고 또 그 때 임오군란 수습후 조선조정의 한계를 느껴 초기에는 청에 의지하였으나,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청이 패한 후 여러 사건 이후 일본을 견제할 세력이 러시아라는 믿음으로 친러 정책을 썼다.

이 때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했지만,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직후 곧바로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을 받았다. 이 때 조선 정부 내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본은 친러 세력의 중심에 민비가 있다고 판단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공사관직원들과 일본군 수비대원 및 일본 낭인을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에 이른바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암호명 '여우사냥'을 저질렀다. 그러나 한심한 조선 조정은 고종을 포함해 어떤 대책도 못 세우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대책 밖에 못세웠다.

자기나라 왕비가 저렇게 능욕 당하고도 총 한 방도 못 쏘며 일본을 응징도 못하는 우리 과거사를 반성해야지 누가 누구를 단죄할수 있을까?

자기 며느리인 민비를 시해하도록 묵인한 대원군도 정말 파렴치한 노욕(老慾)의 인물이며, 당시 고종의 그런 무능은 고종 개인 뿐 아니라 당시 관리들 전부의 책임이다.

망해가는 조선의 한 여인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저 쳐죽일 일본이 민비 시해를 주도했을까? 그러나 그 결과에 조선의 어느 한 사람의 군인이나 의병도 나서서 응징을 하지 않은 슬픈 우리 역사에 명성황후의 그 노래만 애절하게 들릴 뿐 입니다.

개인 견해의 글입니다.
常不輕菩薩 [2015-04-08] : 명성황후 능욕 사건을 읽다보면 그때당시 조선남자들이 얼마나 못났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전글 보운(寶雲) 거사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5] 眞虛性宗 2015-04-09
  다음글 보덕화(普德華) 법우님의 생신을 축하드립... [8] 眞虛性宗 2015-04-06

목록으로 수정하기 삭제하기 추천하기
ⓒ 2001-2004 by Passkorea Co., Ltd. All rights reserved   

후원금보시함

신행상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