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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6 19:54:38, 조회 : 1,065,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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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사문불경왕자론
이민족인 오호五胡가 세운 왕조들은 거부감 없이 불교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신봉했다. '황제는 바로 여래이다.'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던 북방의 왕조와는 달리 한족이 세운 강남의 왕조는 불교를 외래의 종교, 오랑캐의 종교라고 하여 멸시했다. 국가와 불교를 일체화하지 않은 동진에서는 양자가 대립하여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라는 문제를 일으켰다. 340년에 최초로 일어났는 데, 황제의 장인 유빙(296~344)이 승려는 “왕에게 배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서령 하층(292~346) 등이 극력 반대하여 논의는 중지되었다.
그 후 심양 · 강릉 지역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대사마 환온의 아들 환현(369~404)은 승니 감소책의 엄명을 내리는 한편, 승려를 왕권 밑에 예속시키기 위해 사문이 왕자에게 예의를 표해야 한다는 견해를 냈다. 환겸(? ~ 405)과 중서령 왕밀(360~407) 등이 반대하자 환현은 혜원에게 서신을 보내 질의했다. 혜원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출가법과 세간법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출가자는 세속을 떠난 사람들이므로 사문은 왕자에게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환현이 자신의 주장을 단념하면서 논쟁은 중지되었다. 여기서 중국 전통의 예교질서가 외래 종교인 불교의 계율과 충돌하는 장면을 엿볼 수 있다.
③ 유교 · 도교 · 불교의 대립
도교의 기원은 후한 말 장릉(후세에 장도릉이라고도 한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순제(재위 126~144) 시대에 도道를 열고 부서를 만들었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신자는 쌀 다섯 말을 내었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렀다. 장릉의 사후 이 신앙은 손자인 장노족에 이르러 종교 집단으로 조직화되었다.
유교는 개인보다 사회, 국가라고 하는 집단 질서의 존재 형태를 규정하는 이념으로 국가의 강력한 보호 아래에서 발전했다. 이에 반해 도교는 개인의 연명 구제를 꾀하는 신선사상에서 시작하여, 방사(혹은 도사)에 의해 보급되었다. 후한 환제는 황로도黃老道를 신봉하여 황제와 노자를 제사지내고, 그 밖의 제사는 배제했다. 황제는 장생을 기원했고, 전한과 후한 왕조 교체기의 혼란과 사회불안이라는 상황 속에서 지방 사회의 민중들에게 급격히 퍼져 나갔다.
불교가 점차 사회적 세력으로 대두됨에 따라 불교와 도교 사이에 이夷와 하夏의 구별, 선후先後 문제를 중심으로 두 종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조식은 『년도론』을 저술하여 신선술 등의 기망을 명백히 지적했다. 또한 교지에 피난해 있던 모자는 문답체로 『이혹론』이라는 불교 개괄서를 썼다. 이혹'은 미혹함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불교에 대한 다양한 의문점을 저자가 유교나 도교의 생각을 원용하여 불교의 입장에서 답변한 것이다. 내용의 주요 부분은 후한 말기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것이라고 인정 하고 있다. 특히 출가는 도덕에 위배된다고 하는 윤상 문제, 신멸불멸 문제, 중국 사람은 이민족의 가르침에 따라서는 안 된다는 이하론 문제, 불교계의 타락 문제 등은 이후 유 · 불 · 도 삼교 간의 논점이 되었다.
서진 시대의 불교와 도교의 논쟁은 백원과 도사 왕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왕부의 저작이라 일컬어지는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은 이 논쟁의 산물이다. 왕부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 즉 노자가 천축에 가서 석가를 교화시켰다.'고 하는 설을 제창 하여 승려와 논쟁을 벌였다. 강대한 교단으로 성장한 불교에 대항해 도교를 불교보다 우위에 두려는 의도였다. 『노자화호경』은 이후 불교와 도교가 논쟁을 벌일 때 항상 이용되었다. 이에 대해 불교 측에서는 노자 · 공자 · 안회를 '보살의 권현'이라고 간주 하는 『청정법행경淸淨法行經』을 저술했다. 당나라 때에는 일시적으로 논쟁을 금지하는 조서가 내려지기도 했다. 마침내 원나라에 들어와서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불교의 급속한 발전은 다양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유교 측에서는 승려가 유민좌식遊民坐食하고, 조세를 납부하지 않으며, 사탑의 건립으로 국비를 낭비하는 등 국가에 이익이 없는 존재라고 비판했다. 또한 처자를 버리고 출가하고, 부모를 양육하지 않으며, 왕자를 존경하지 않는 등 중국의 윤리와 강상을 저버린다며 비난했다.
④ 서역으로 떠난 구법승들
일찍이 중국 승려 주사행은 구법을 위해 서역으로 들어갔다. 동진 시대에도 경전을 구하거나 천축의 고승에게 사사하여 가르침을 받거나, 혹은 성지를 탐방할 목적으로 서역이나 인도로 떠난 승려가 다수 출현했다. 이들은 학문적인 소양을 쌓았기에 이국의 사상을 흡수하고 불전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번역 사업 등에 큰 공적을 남겼다.
이 시대 대표적인 구법승으로 법현(338~422) · 지엄 · 보운을 들 수 있다. 법현은 일찍이 율장이 모자라는 사실을 개탄하며 경론을 구할 것을 맹세했는데, 마침내 399년에 동학 11명과 장안을 출발하여 파미르고원을 지나 30여 국을 거쳐 북천축 · 중천축에 도달했다. 『마하승기율』 및 경전과 불상을 손에 넣고, 사자국(현재의 스리랑카)에 머문 후 상선을 타고 산동성 청주에 도착했다. 법현은 14년간 겪은 각국의 불적 · 종교 · 풍속 · 지리 등의 견문을 『법현전』 1권에 기술했다. 『법현전』은 현장의 『대당서역기』,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과 함께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관한 귀중한 정 보를 제공한다.
지엄은 계빈(카슈미르 혹은 간다라 지방에 있던 나라)에 갔다 장안으로 돌아왔다. 후에 건강으로 들어가 보운 등과 『보운경』을 번역했다. 후에 재차 선관을 구하려고 해로를 이용해 인도로 들어갔다. 보운은 북인도에 갔다 장안으로 돌아왔다. 후에 건강의 도량사에서 『불본행경』을 번역했다. 이후 많은 승려들이 인도에 들어가 구법 활동을 했고,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노력에 의해 중국불교는 발전하게 되었다.
행복의 샘 - 위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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