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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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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3 09:19:48, 조회 : 1,078,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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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증내지난가측
唯證乃知難可測이라.
오직 증득해야 알 바요 헤아리기 어려움이라.
여기서 ‘증(證)’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증’이란 증득하다, 깨닫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이 ‘증’자를 궁극의 깨달음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이미 갖춰져 있는 오안을 청정하게 하고 오력을 얻는다는 것은 궁극의 깨달음을 증득해야 즉 부처님처럼 완벽하게 깨달아야 비로소 알 수 있지, 그 외의 사량 분별 등으로 측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로 해석합니다.
그런 해석대로라면 부처님의 완전한 깨달음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체험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또한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이전, 그 과정에서 행해지는 온갖 노력과 온갖 체험들 역시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해석은 ‘증’자의 의미를 너무 높이 설정해 놓는 것입니다. 누구도 닿을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높은 곳에다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사자가 그런 목표에 도달하고 나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래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가 말하는 “~그래야만 된다”라는 당위를 주장하는 것일 뿐이고, “~하면 ~한다”라는 가정(假定)에 그칠 뿐입니다. 그렇게 말은 할 수 있지만 말하는 화자도 그런 말을 듣는 청중도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서로가 그저 공허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타인을 무시하고 질책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증’자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깨달음과 증득을 그렇게 남의 일로만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처럼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만 깨달음인가? 아닙니다. 큰 깨달음이 있는가 하면 작은 깨달음도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더라도 귀 기울여 듣고 깊게 이해하고 세밀하게 사유하다 보면 나름대로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완벽하게 깨달아야만 오안을 청정하게 하고 오력을 얻을 수 있는가? 아닙니다. 배우고 익히고 노력해 나름대로 깨달은 만큼 오안이 맑아지고 오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듣고 배우고 이해하고 사유해서 아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육종 혜능대사도 나무 팔러 장에 갔다가 우연히 「금강경」 한 소절을 듣고 깨달았다지 않습니까? 경전 구절 한 마디에 인생과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듣고 아는 힘입니다. 육조대사가 경전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귀에 들렸더라도 그 말씀을 사유해 보지 않았다면, 그러고도 깨칠 수 있었을까요? 육조 스님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도 듣고 배우고 익히고 사유하다 보면 나름대로 알아지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 앎이 쌓여서 결국 큰 깨달음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작은 증득, 작은 깨달음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완벽한 깨달음에만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건 허공을 딛고 지붕으로 올라서려는 것입니다. 지붕에 오르려면 사다리를 딛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경험하는 일들 또 경험할 수 있는 일들에 바탕을 두고 완전한 깨달음을 향해 한발 한발 옮겨 가야지, 과정을 무시하고 완전한 깨달음만 찾는다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입니다.
경리간형견불난
鏡裡看形見不難이나
거울 속의 형상이야 보기 어렵지 않겠지만
이는 앞에서 "육반신용공불공(六般神用空不空)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라" 한 구절과 같은 뜻입니다. 앞에서는 우리 마음의 본체와 작용을 마니주(摩尼珠), 즉 여의주에 빗대어 설명하였고, 이 구절에서는 거울에 빗대어 설명하였습니다. 거울에 형상을 비춰보면 잘 보입니다.
얼굴 생김새도 정확히 보이고, 옷매무새도 훤히 잘 보입니다.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의 작용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ㆍ뜻의 육근을 통해 활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거울 속에 정말 사람이 있습니까? 분명히 보이기는 보이는데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이를 망각하고서 바깥에 뭐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뭔가 마음에 든다 싶으면 혹합니다. 그것이 미혹(迷或)입니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것은 허망한 인연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걸 반조(返照)할 줄 모르고 자꾸 바깥 경계만 좇는 게 중생의 병입니다. 그러면, 공부와 수행이란 무엇인가? 이런 사실을 돌이켜 비춰 보고 밖으로 내닫던 습관을 스스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번뇌나 망상이라 부르는 것만 인연의 그림자인가? 해탈이니 열반이니 깨달음이니 성품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깨달음과 해탈을 밖에 있는 물건을 주워 내 주머니에 넣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그런 식으로 견성하고 깨달으려 한다면 아무리 수행해도 견성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습니다. 문수보살을 찾는 그것이 살아 있는 문수보살입니다.
신청곡 : 공(空) - 나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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