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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으로 보는 세계 불교사 43
법광(法光) 2020-10-04 02:11:39, 조회 : 977, 추천 : 0



③ 북조 불교의 경향과 추이
서위 · 북주는 『주례』에 의한 복고적 제도를 채택했지만 불교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 교단은 도교 교단과 함께 국가의 보호를 받아 왕공 귀족을 중심으로 대승의 가르침을 열심히 신앙했다.

남조 불교가 국가로부터 두터운 보호를 받은 데 반해, 북조 불교는 도교와의 세력 다툼을 겪었으며 국가적 탄압인 폐불을 당한 후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북위에서는 도무제(재위 386~409) 시대부터 국가가 불교를 관리 통제하였다. 초대 도인통道人統(후에 는 사문통)이 된 법과는 황제를 '지금 이 시대의 여래如來'라고 떠받들었다. 승려는 황제를 배알해야 했는 데 이는 북위 불교가 국가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왕자에 대한 예의를 거절한 남조의 승려 나 불교 신도와는 대조적이다.


1) 북위의 불교
북위는 중국 동북부 대흥안령에서 시작한 선비 탁발씨가 세운 나라이다.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산서성 북부의 대동을 중심으로 북방의 패자가 되는데 화북을 통일한 전진 부견의 공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전진이 붕괴하고 탁발규, 즉 도무제가 세력을 재결집해 규모가 확대되었다. 그는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정했다.

북위는 불교 국가라고 할 만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도무제가 화북에 진출할 때까지는 불교와의 관계가 그리 밀접하지 않았다. 도무제는 대동으로 수도를 옮긴 후 불교를 존중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조서를 내려 사찰과 불상의 조영을 명하였다. 그리고 사문 법과를 도인통에 임명하여 승니를 통괄하게 했다. 법과의 '황제는 즉 여래이다.'라는 주장은 북조 불교계에 오랫동안 계승되어 불교의 국가적 성격을 강조 하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태무제는 부친 명원제(재위 409~423) 시대에 회복되어 강고해진 권력 기반을 배경으로 재차 조법에 따라 관제 · 법령 등의 개혁을 단행하여 수차례 정복 전쟁을 수행했다. 마침내 439년에 3대 태무제(재위 423~452)는 화북의 극심한 혼란을 잠재우고 통일을 달성했다. 태무제는 북량을 멸망시키고 승려 3 천 명을 당시의 수도였던 평성으로 이주시키면서 불교 국가로서의 성격을 급속히 강화시켰다.

처음부터 불교에 호의적이던 태무제였지만 교단의 확대에는 반대했다. 황제는 후한 말 중국에서 시작 된 도교를 개혁하라는 계시를 태상노군으로부터 받았다며 신도교를 설파하는 숭악의 도사 구겸지(365~448)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태무제는 구겸지와 배불론자인 한족 재상 최호(381~450)의 영향을 크게 받아 50세 이하는 승려가 될 수 없다는 조서를 발하였다. 더욱이 440년에 황제는 연호를 태평진군으로 고치고, 자신이 도교의 군주가 되었음을 천하에 선포하였다. 444년에는 왕공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승려 · 사무를 사적으로 양성하는 일을 금지시켰다. 이를 어기는 승려는 사형, 몰래 양육하는 자는 일가를 주살했다.

446년 섬서에서 개오의 난이 발생했을 때 장안의 사찰에서 대량의 무기가 발견되어 반란을 모의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게다가 거액의 재보 은닉과 부녀와의 음행도 발각되었다. 태무제는 폐불을 알리는 조서에서 “호의 요괴, 호의 신을 모두 폐하고 거짓 가르침을 배제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사탑 · 불상은 파기되고, 경전은 소각되었으며, 사문은 연령을 불문하고 주살되었다. 마침 태자감국 탁발황이 불교 신봉자여서 사문 살해의 시행을 지연시켜 일부의 승려는 국외로 도피할 수 있었다.

태무제는 재위 중에 불교를 금절했다. 태무제가 병사한 후 문성제(재위 452~465)가 즉위하자 불교는 세력을 떨쳐 북위의 국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진다. 군현에 사찰 일구一區를 세워 출가를 허락하고, 계빈의 사문 사현을 사문통에 임명해 불교 부흥에 나섰다.

사문통이 된 담요는 문성제 · 헌문제(재위 465~471) · 효문제(재위 471~499)의 3대 황제를 모시고 북위 불교 전성기의 기초를 닦았다. 효문제는 5년 후인 499년 남조 토벌 중에 병사했다. 뒤를 이은 선무제(재위 499~515)는 5만여 명의 인력을 징발하여 낙양의 대수축을 거행했다. 도성은 동서 20리, 남북 15리에 달하는 장대하고 화려함을 자랑했는데, 성 안에 가람이 1,367곳이나 되었다고 하다.

천하의 사찰 수는 1만 3,727곳에 달했다. 당시 북위는 파미르고원에서 동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들 중 어디 하나 복종하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로 강대한 국가였다. 호인의 대상이나 행상인들은 매일처럼 국경을 넘어 들어와 거주했다. 북위를 연모하여 귀화한 외국인만도 1만 호 이상이었다. 쉽게 보기 힘든 물자도 모여들었다. 이러한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 선무제의 황후인 영태후가 창건한 영녕사였다. 서역에서 온 승려로 선종의 개조인 보리달마는 영녕사 사탑의 금반이 햇빛에 반사해 구름을 비추는 모습을 보고 찬문을 지어 그 장광을 읊었다고 한다.

4월 4일부터 시작되는 불탄회에는 황금과 옥 등으로 장엄한 불상을 만들어 수도 낙양의 거리를 순회시켰다. 7월에는 장안에 등록된 1천여 구의 불상이 선무제가 건립한 경명사에 모여들었다. 이렇 게 모인 불상들을 초8일에 궁성으로 가지고 들어가면 황제가 황금으로 만든 꽃을 뿌렸다.

이러한 불교 행태는 진지한 신앙 자세에서 일탈하여 호화로운 사찰이나 불상 조영에 주로 뜻을 두었던 것으로, 재물과 백성들의 힘을 소모시키는 귀족 불교적인 퇴폐 현상도 발생시켰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무제의 아들인 효명제(재위 515~528)도 불교를 비호하여 불교는 더욱더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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