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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비스님의 증도가 강의-026
普德華 2020-10-07 14:21:07, 조회 : 1,005, 추천 : 0
조고신청풍자고
調古神淸風自高나
곡조가 예스럽고 기운이 맑아 그 기풍 절로 높지만

이 구절은 열반의 길을 걷는 사람들, 즉 도인들의 삶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고, 영가 스님 자신의 삶을 묘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조고(調古)’는 그 곡조(曲調)가 예스럽다는 것입니다. 그 삶에 고아했던 옛 성현들의 풍모가 서려 있다. 옛 성현들처럼 격조가 넘친다. 옛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청(神淸)’은 정신이 맑고 깨끗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풍자고(風自高)’라, 풍모(風貌)가 저절로 고아(高雅)하다는 것입니다. 즉 도풍(道風) · 법풍(法風) · 가풍(家風)이 절로 드높다는 것입니다.

영가 스님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감이 넘쳤던 분입니다. 육조 스님을 처음 찾아뵈었을 때도 당당했고, 육조 스님과 문답할 때도 당당했고, 하룻밤 자고 훌쩍 떠날 때도 당당했습니다. 천불이 출세한다 해도 눈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당당했기에 이런 표현도 스스럼없이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貌悴骨剛人不顧
모췌골강인불고라
얼굴은 초췌하고 뼈가 앙상해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네

부처님 가르침을 확실히 깨달아 고아한 풍모에 자신감이 넘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가 스님은 초라한 행색에 뼈만 앙상한 볼품없는 승려일 뿐입니다.

왜 그런가? 그들은 열반과 깨달음, 진실과 실상에는 관심없고 무상한 빛깔과 소리에만 눈과 귀가 팔려 쫓겨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 눈에는 영가 스님의 고아한 풍모와 깨달음의 노래가 볼품없는 행색과 쓸데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또 긴 세월 얼마나 고심했으면 이렇겠습니까. 부처님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시기까지 갖은 신고를 다 겪어셨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출토된 고행상(苦行像)을 보면 뼈와 힘줄, 혈관까지 드러날 정도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입니다. 이 구절을 읽다 보면 영가 스님도 깨달음의 문제에 얼마나 골몰했기에 이런 모습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궁석자구칭빈(窮釋子口稱貧)이나
궁색한 부처님의 제자들은 입으로는 가난하다고 하지만

'석자(釋子)'는 석가모니의 제자를 말합니다. 석자는 꼭 출가수행자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출가수행자뿐 아니라 사부대중이 다 해당 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제자, 부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신분이나 외향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교를 좋아하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추구하며 청정하게 살아가고, 그런 삶의 가치관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다면, 그 사람이 곧 부처님의 아들입니다.

특히나 스님들은 온 생애를 바쳐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겠다고 출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석가모니의 자손이란 뜻에서 세속에서 쓰던 성씨(姓氏)를 쓰지 않고 석씨(釋氏)라 칭합니다.
이 전통은 약 4 세기경 중국 동진(東晉)의 도안법사(道安法師)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출가 사문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부터 다시 태어났으니, 성도 석씨라 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 동양권에서는 법명 앞에 굳이 성을 쓸 때면 석(釋) 자를 씁니다. 저 역시도 석무비(釋無比)라 칭합니다.


실시신빈도불빈
實是身貧道不貧이라.
실은 이 몸이 가난하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닐세.

특히나 출가수행자들은 이 말씀을 귀감으로 삼아야 합니다. 저도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 부끄러워 반성하게 됩니다.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이들이 이 말씀과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몸은 부자인데 도가 가난합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 막 새마을 운동 일어날 무렵에는 다들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습니까. 그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은 국가가 몇 백 배나 부유해졌고, 국민 역시도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의식주가 넉넉해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느끼는 삶의 질은 그다지 나아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공동체 의식이 훼손되어 이웃과 가정마저 파괴되고, 인간의 기본적 윤리마저 망각한 파렴치한 범죄들이 판을 치고, 상대적인 박탈감과 소외감 속에서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물질은 더없이 풍요로워졌을지 모르나 윤리와 도덕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확고한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 만큼 줄어들었습니다. 실로 지금 우리 사회는 도(道)가 상실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속 사회만 그런가? 사정은 우리 절집이라고 별반 나을 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부유해지다 보니 절집도 저절로 부자가 되어 스님들이 수용하는 물품들 역시 넉넉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정말 냉정하게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60년대 가난하던 그 시절의 절집과 지금의 절집을 비교했을 때, 과연 어느 쪽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접한 삶일까요?

정작 굶주리고 헐벗던 그 시절에는 스님들의 구도열이 하늘을 찌를 듯이 치열했고, 또 안팎으로 존경받은 훌륭한 도인과 강백들도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생활환경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확신을 가지고 오롯이 정진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몸은 가난해도 도가 부자여야 하는데, 도리어 그 반대로 몸이 부자이고 도는 가난합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까요? 우리 삶에서 진정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정말로 물질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면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행복해졌어야 마땅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는 우리 사회 전체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더구나 승가는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청정한 삶, 올바른 삶, 진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출가를 하고도 부와 명예를 좇는다면 그건 이율배반적인 행동입니다. 둘 중 하나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 그겁니다. 출가를 했다면 부와 명예에 초연해야 하고, 부와 명예를 추구한다면 출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승가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으로부터 열반의 길, 해탈의 길, 행복의 길, 평안의 길, 자유의 길, 즉 도(道)를 배우고 터득하기 위해 불법을 공부하는 것이지, 배불리 먹고 좋은 옷 입으려고 불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성취한 도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해야지 돈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마음자세입니다. 이런 마음자세를 갖춘다면 설령 경제적으로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마음만큼은 넉넉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겪는 열등감과 좌절도 다소 해소되리라 생각합니다.

신청곡 : 구도의 길(심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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