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방송게시판
|
|
|
|
![]()
|
|
2020-11-07 19:09:44, 조회 : 1,004, 추천 : 0 |
|
|
|
|
9 오대십국 시대의 불교
① 오대십국 불교의 추이
당나라 말에 발생한 황소의 난(875~884)은 중앙에서의 당쟁과 환관들의 횡포, 아울러 지방 번진 세력의 강대화로 조정의 통제력이 흔들리면서 발생했다. 또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점점 심해지자 지방 토호나 상인도 차츰 왕조에 등을 돌리는 대열로 들어섰다. 결국 황소의 난은 토벌됐지만 이후 일어난 절강과 서주 등지에서 발생한 반란 등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당나라는 붕괴되고 만다.
907년에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면서부터 약 50년간 화북에서는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의 다섯 왕조가 흥망을 반복했다. 한편 화중이나 사천, 화남에서는 10여 개의 지방정권이 자립하여 병존하다 후주를 대체한 송나라가 오월을 평정하고, 979년에 북한을 멸하면서 중국 내지의 통일을 완료한다. 이들 지방정권의 주요한 여러 나라, 즉 오 · 남당 · 전촉 · 후촉 · 남한 · 초 · 오월 · 민 · 형남 · 북한을 십국十國이라 부른다.
이 시기의 혼란은 남북조 시대에 버금갈 정도였다. 불교계 또한 한층 경직된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에 삼무일종의 법난 중 마지막인 후주 세종(재위 954~959)의 폐불 사건이 발생했다. 세종은 955년에 사찰과 탑을 파괴하고, 불상과 종을 녹여 주통전을 주조했다. 그러나 사회가 혼란스러웠음에도 대체적으로 각 왕조에서는 불교를 예우했다. 특히 송나라에 멸망당하기까지 80여 년간을 유지한 오월과 민 등의 국가는 불교에 대한 예우가 극진했다.
오대 각 왕조는 불교를 단속하는 조칙을 자주 발하였다. 후량의 말제(재위 913~922)는 예부원외랑 이추가 상주한 불교 억제책을 듣고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자의 · 사호는 결원이 있을 경우 고덕한 승려를 선택하여 충원하며, 매년 천자의 탄생일에 좌우가 각각 7명씩만 도첩을 주고, 양가에 승록만 두되, 승정은 폐지하도록 명했다.
돌궐 사타부 출신으로 사실상의 후당 건국자인 이극용(856~908)이 후량과의 전투에서 병사 하자 아들 이존욱, 즉 장종(재위 923~925)이 뒤를 이었다. 그는 수도를 낙양으로 정하고 명액이 없는 작은 사찰은 병합시켰다. 이후 황제들은 새로운 사찰 건립과 사도를 금지시켰다. 또한 승니의 풍기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고자 출가자에게 시험을 치르게 했다.
후당 시대의 특기할 만한 일은 역대 왕조를 본받아 경서를 돌에 새기는 일을 계획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비 문제로 재상 풍도(882~954)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판인쇄로 변경했다. 932년 명종 대에 시작된 사업은 네 왕조의 멸망을 거쳐 953년 후주 태조 대에 완성되었다. 이는 경서가 인쇄된 최초의 일로 국가에 의한 출판 사업의 시작이기도 하다.
서역 출신 석경당은 후당 명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거란 방어의 중요 요지인 진양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폐제(재위 934~936)에게 반역의 의사를 내보이고 거란에 군사 원조를 청했다. 그 대가로 거란에 연운십육주를 할양하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후진이라 정하니 이가 바로 고조(재위 936~942)이다. 고조는 탄일과 절일에 시험을 치르고 사도승을 금지해 이를 어기는 자는 중 벌에 처했다.
돌궐 사타부 출신 유지원(즉 후한 고조)은 요나라가 후진을 멸망시키자 947년 제위에 올라 국호를 후한이라 하였다. 후한 시대에는 사찰 · 승니를 감축한 반면에, 백승재를 열기도 했다.
멍텅구리 - 법만스님 |
 |
|
[2020-11-08] |
: |
법광 거사님,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세계불교사는 내일(월요일) 아침방송에서 공부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
 |
|
|
|
|
|
|
|
|
|
|
|
ⓒ 2001-2004 by Passkorea Co., Ltd. All rights reserved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