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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으로 보는 세계 불교사 93
법광(法光) 2021-02-14 22:44:18, 조회 : 987, 추천 : 0



2. 몽골 제국의 불교 수용
이상에서 살펴본 불교 전파의 북아시아적 전통은 거란, 서하, 여진, 티베트 등 다양한 계통으로 계승 발전되는데, 13세기 몽골의 등장으로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이라는 통일 정권 아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한다.

칭기즈 칸에 의해 제국이 건설되면서 몽골 지배층은 불교, 이슬람교, 동방기독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와 접촉한다. 이는 광대한 지배 지역을 파악하고 지역의 지도자를 포섭한다는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도교의 일파 전진도의 지도자 장춘진인 구처기(1148~1227)가 칭기즈 칸의 존숭을 받은 것도 그가 금 황제들의 종교적 스승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중원의 불교이든, 서하나 티베트의 불교이든 몽골정권의 입장에서 어느 한쪽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일은 없었으며, 또한 이슬람교, 기독교 등 다른 종교와 구별하여 불교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일은 더욱이 없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티베트불교계와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상황에 변화가 발생한다.

처음 몽골정권이 티베트 교단과 접촉한 것은 샤카 교단의 교주 사뻰(샤카판디타의 준말) · 뀐가겔첸(1182~1251) 과 우구데이 칸의 둘째 아들 쿠텐(?~1251)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쿠텐은 서하의 옛 영토를 분봉 받아 서량부(현재 감숙성 무위)에 주둔하면서 티베트 등지로 세력을 확대시켜 티베트 지배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몽골군의 공격을 받은 티베트 각지의 세속 군주 및 불교 교단은 샤카 교단의 사뻰을 대표로 추대하여 몽골과 타협하도록 했다. 이에 1246년 사뻰은 어린 조카 팍빠와 체나도르지를 데리고 서량부로 가서 쿠텐을 만났다. 쿠텐은 그에게 종교 사무의 고문을 맡게 함으로써 샤카 교단과 몽골 황실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많은 티베트 측 사서에서는 샤카 교단의 시조 뀐가닝뽀(1092~1158)가 이미 칭기즈 칸을 만나 그의 존숭을 받았다고 기록함으로써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게 티베트와 몽골의 관계가 제국의 창시자 칭기즈 칸과 샤카 교단의 시조 사이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샤카 교단은 11세기 말 티베트에서 성립된 종파로 전형적인 씨족 교단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쾬 씨 가문이 교주와 세속 영주의 지위를 모두 장악한 것이다. 이 교단은 뀐가닝뽀가 티베트에서 명망을 얻으면서 성장하기 시작했고, 13세기 몽골의 후원 아래, 티베트 최대의 교파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다 14세기 후반 팍모두 교단이 성장하면서 샤카 교단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곧 샤카 교단의 발전과 몽골의 후원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뀐가겔첸의 뒤를 이어 교단을 계승한 팍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하겠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재위 1260~1294)은 동생 아릭부케와의 경쟁을 거쳐 칸의 지위를 획득했다. 우구데이 칸의 아들 쿠텐을 통해 몽골정권과 연결되기 시작한 샤카 교단의 입장에서는 우구데이의 후예가 아닌 톨루이(우구데이의 동생)의 후예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새로운 몽골의 정치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쿠텐을 만나고 몽골 조정에서 생활하던 팍빠(1235~1280)는 몽골 정계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했고, 톨루이의 아들 쿠빌라이를 배알하는 등 그가 칸에 등극하기 이전부터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쿠빌라이와 팍빠의 관계는 12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송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사천을 거쳐 운남 대리국으로 진공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진중에서 팍빠를 만났고, 그는 법회를 열어 호법신 대흑천 마하칼라가 쿠빌라이와 그의 군대를 보호하도록 기원했다. 집권 이후, 쿠빌라이는 적극적으로 티베트불교를 수용하고 팍빠를 국사에 이어 제사로 임명했다. 이는 당시 주요 종파의 하나였던 샤카 교단의 지도자인 그의 권위를 통해 티베트불교 영향권 아래에 있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팍빠의 동생 체나도르지(1239~1267)를 백란왕에 봉하고 몽골 제국 대원 울루스의 부마로 삼은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쿠빌라이는 자신이 건설한 새로운 도시 대도(현재 북경)를 불교식으로 꾸미기 시작했는데, 제사 팍빠는 쿠빌라이의 종교적 스승인 동시에 대도에서 거행하는 각종 불교식 행사의 주재자였다. 대도에는 묘응사(현재 북경 백탑사)가 건설되고, 대도의 북쪽 관문 거용관의 운대에는 화려한 사천왕 상과 산스끄리뜨, 한문, 서하문, 몽골문, 티베트문 등으로 쓴 불경을 새겨 넣음으로써 대도로 들어오는 모든 이들이 불법의 영역으로 들어옴을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국사였던 팍빠를 제사의 반열에 오르게 한 계기는 1270년 새로운 몽골 문자 즉, 팍빠 문자의 창제였다. 팍빠 문자는 당시 다양한 언어로 된 고유명사를 기록해야 했던 몽골 제국의 공문서 작성을 돕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형태의 문자였다. 따라서 몽골 문자로 표기하기 어려운 여러 종류의 음운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우수한 표음문자였다. 이는 당시 티베트계 승려들이 불교철학은 물론 음운학 등 다양한 형태의 학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를 통해 13~14세기에 걸쳐 티베트와 티베트의 승려들이 동부 유라시아의 지성계를 이끄는 하나의 중요한 축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 지배 층이 팍빠를 비롯한 티베트의 승려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를 계기로 팍빠는 제사대보법왕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이후 14세기 중엽까지 모두 14명의 제사가 샤카 교단 퀜 씨 가문에서 임명되었다. 샤카 교단과 몽골 조정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몽골이 샤카를 통해 티베트를 통치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몽골 제국 말기로 갈수록 샤카 교단의 역할은 점차 약화되는데 실상 몽골정권은 초기부터 샤카 이외의 다른 교단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이 치궁, 닥룽, 팍모두 등의 교단이며 이들은 제국 초기부터 몽골 중앙정권과 연결되어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면서 샤카 교단과 경쟁했다. 이렇듯 확대일로에 있던 티베트와 몽골의 관계는 14세기 후반 몽골정권이 대도를 상실하고 몽골초원으로 퇴각하면서 점차 역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얼마나 된다고 - 장태민

眞虛性宗 [2021-02-15] : 법광 거사님,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세계불교사는 모레(수요일) 아침방송에서 공부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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