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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8 00:35:29, 조회 : 1,009,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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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신년기원대법회에 참여하는 주요 외부 인사가 늘어남에 따라 참석자들의 좌석을 배치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예의禮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원칙을 정해 둘 필요가 있었는데, 1672년 5세 달 라이라마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치를 발표했다. 5층 방석과 등받이로 이뤄진 달라이라마의 좌석 부터 샤카, 카르마, 닥룽 등 티베트 주요 교단의 대표는 물론 암도와 몽골의 세속 군주 및 승려에 대한 좌석도 자세히 구분하여 순서를 매겨 두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몽골의 후원으로 성장한 겔룩 교단은 여러 몽골 세속 군주는 물론, 청을 건국한 만주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확대시키면서 내륙아시아 불교 세계 내부의 질서를 조정하는 구심점으로 역할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 청 제국이 중원을 장악하고 뒤이어 몽골, 티베트, 위구르(현재 신강성)를 차례로 복속시킴으로써 대제국을 건설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청 제국의 건설은 소수의 만주인이 주축이 되어 몽골과 한족 사회를 아우르면서 가능했다. 만滿 · 한漢 · 몽蒙을 아우르는 팔기八旗 조직이 그러하며, 태종 홍타이지가 차하르 몽골의 통합을 기념하기 위해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淸으로 바꾸던 1636년 의 상황이 그러했듯이, 몽골과 한족에 대한 통치력의 확대는 청조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주변 몽골의 극복을 통해 세력을 키워야 했던 만주로서는 몽골의 정통성 계승과 유목 군주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당면 과제였다. 따라서 몽골의 통치자이며 계승자로서 청의 황제는 유목 군주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이미 티베트불교가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은 내륙아시아에서 때로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며, 전륜성왕인 동시에 티베트불교의 신실한 시주施主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유목 군주 칸으로서 몽골을 계승한 내륙아시아의 패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했던 것이다.
16~17세기 초를 거쳐 몽골과 만주는 티베트불교권의 주요한 신자로 일찍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청조의 황제가 신자였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요遠 · 금金 · 원元이 그랬듯이 만주도 한화漢化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에 한족처럼 만주의 황제도 결코 티베트불교를 받 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들과의 관계는 철저히 지배를 위한 수단이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 유목 군주에서 출발한 후금의 지배자가 중원 진입을 전후해 중원의 황제로 탈바꿈했다고 이해되는 것은, 중원의 군주가 유목 군주에 군림하는 상위의 존재라는 한인漢人의 막연한 민족적 우월감이 작용한 탓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청조의 황제는 한인에게는 황제였지만, 유목의 세계에서는 몽골 자신을 포함한 불교 세계 전체를 수호하는 '복드 칸'이었다. 또한 만주의 요람은 유목 세계의 동편 자락에 있었고, 그들은 몽골을 철저히 계승함으로써 동시에 경쟁자 몽골을 극복해야 했다. 청조의 황제가 라마를 만났던 것은 자신의 신앙이었기 때문이고, 그 신앙은 유목 세계의 보호자로서 청조에 의무와 책임을 요구했다.
동으로 만주의 요람에서 카스피해 연안의 칼믹 공화국(오이라트의 후예)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동서에 길게 늘어서 있는 티베트불교의 흔적들은 사실상 16세기 이래 전개된 몽골의 확산과 뒤를 따라 형성된 ‘티베트불교문화권’의 잔영인 셈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몽골 전교는 중요한 시발점이며 원동력이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불교문화권의 확산은 몽골 팽창의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이것이 청조에 의해 통합되고, 불교 세계의 수호자로서의 지위를 청조에게 양보함으로써 몽골과 티베트의 강고한 유대는 점차 희미해져 갔다.
연꽃에 물들다 - 박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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