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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5 10:25:33, 조회 : 993,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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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佛性)에 초점을 맞춰 살아야 한다.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수보리須菩提야 불설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密이 즉비반야바라밀卽非般若波羅密일새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密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如來가 유소설법부 有所說法不아 수보리須菩提가 백불언白佛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는 무소설無所說이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반야바라밀이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법하신 바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즉비卽非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즉비라고 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본래 없던 것이고, 만든 것입니다. 또한 만들었다 하더라도 ‘무엇이다’라고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텅 빈 것이고 공한 것이라고 누차 말씀드렸지요. 이런 저런 인연을 얼기설기 묶어서 ‘금강경 법회다’ ‘이것이 금강경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 이름이 금강경일 뿐입니다.
즉비의 논리는 세상 모든 만물에 다 적용시켜도 모두 해당되는 논리입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고 그 이름이 아버지다’ ‘학생이 학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학생이다’ ‘스님이 스님이 아니고 그 이름이 스님이다’라고 다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사유해 보면 기가 막힌 말이고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한 남자가 아버지라고 해도 그 아들에게나 아버지이지 아내에게는 남편입니다. 그의 손자에게는 할아버지요, 직업이 학교 교사라면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입니다. 개중에 장난꾸러기 학생들에게는 짓궂은 별명으로도 불리겠지요. 이름은 이름일 뿐입니다. 사람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지침인 금강경마저도 ‘시명반야바라밀’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이해하면 그것에 매달리거나 집작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이야말로 금강경다운 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많은 설법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설법한 바가 없
다고 하신 것은 무득무설분에 잠깐 언급되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부처님같이 설법을 많이 하신 분도 드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삼계三界의 대도사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의 위대한 설법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수보리도 수십년 동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살아 왔고, 그 설법을 통해 자기 인생을 엮어가고, 그것을 기준 삼아 수행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래가 설한 것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안목입니다. ‘설법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 설법을 했다고 하는 관념, 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금강경은 대승불교적인 안목으로 설해졌기 때문에 보통 상식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처님이 설법한 것이 있다’ ‘깨달음이 있다’ ‘복이 있다’ ‘죄가 있다’라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요즘 곳곳에서 참회하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참회도량이라 해
서 아예 참회를 전면에 등장시킨 사찰도 있습니다. 참회할 게 얼마나 많은지 참회를 입에 달고 삽니다. 하지만 보다 더 차원 높은 안목으로 보면 죄나 참회도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주눅 들고 좁은 안목을 가지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죄든 복이든 금강경의 안목이 열려야 됩니다. 복도 없다는데 죄인들 있겠습니까? 천수경에도 “죄라는 것은 고정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부 우리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죄는 마음에 건립된 것이니까 마음만 없다면 모든 죄는 사라진다. 죄가 없고 마음도 없으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참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을 어디에다 초점을 맞출 것인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본래 텅 빈 우리의 심성자리, 우리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놓으면 차원이 달라집니다. 보살이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자기 처지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 누구와 비교해도 높은 경지에 있고, 돈도 많고, 지식도 많고, 건강도 좋아야 보살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이 열악하다 해도 정신이 보살행으로 무장되어 있으면 여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문제 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의 삶은 ‘무엇에 관심을 쏟고 사느냐’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또한 벌레 먹은 사과도 있고, 튼실하게 잘 영근 사과도 있을 때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 게 좋겠습니까? 사람들 중에는 벌레 먹은 사과에 초점을 맞추고 늘 불평불만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잘 영근 사과에다 초점을 맞춰야 행복지수가 높아집니다. 세상살이의 작은 행복도 그렇지만 정신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히 고귀한 인간의 본래 모습,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천 배 만 배 더 소중한 불성佛性에 눈을 뜨고 거기에 초점을 맞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래 간직한 불성생명을 되살려 쓸때 우리들은 이 몸 그대로 부처가 되고, 우리 사는 세상이 불국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름이 먼지요,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이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二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이 시위다부是爲多不아 수보리須菩提언하사대 심다甚多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수보리須菩提야 제미진諸微塵을 여래如來가 설비미진設非微塵일새 시명미진是名微塵이며 여래如來가 설세계說世界도 비세계非世界일새 시명세계是名世界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먼지의 수를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먼지를 여래는 말하기를 '먼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먼지일 뿐이다'라고 하며, 여래가 말하는 세계도 또한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뿐이니라."
지금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 깨달음, 보시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갖가지 상相에 대해 언급하면서 상에 대한 무상無常을 강조하며 집착을 털어내었는데, 여기에서는 눈에 확실히 보이는 세게에 대해 언급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삼천대천세계, 그 큰 우주 덩어리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미진, 즉 가는 먼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하나하나 쪼개면 먼지로 되어 있고, 먼지 하나하나가 결합하여 지구가 된 것입니다.
처음에 이 우주 공간에서 하나의 별이 생길 때도 먼지 하나하나가 결합할 때마다 충돌이 일어나고, 충돌에 의해 자력으로 먼지가 자꾸 모여들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원하리라 믿고 의지하는 이 지구도 결국 무상한 먼지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본질에 있어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주, 지구는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현실감이 덜어질 것입니다. 작은 예를 들면, 연필 한 자루도 낱낱이 쪼개놓고 보면 먼지입니다. 쌀 한 톨도 가루를 내면 먼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세계를 구섷아는 것은 온통 먼지뿐입니다. 그런데 그 먼지는 먼지가 아니고 이름이 먼지일 뿐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연필을 쪼개고 또 쪼개 보면 먼지이지만, 눈앞의 연필은 먼지가 아닙니다. 쌀도 부수면 먼지이지만 먼지 이전에는 쌀입니다.
눈에 보이는 연필, 쌀, 먼지는 인연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선방에는 부전副殿이라는 소임이 있는데, 선방을 관리하고 청소하는 일을 합니다. 수십 년 전 선방에서 한 철 날 때인데, 부전을 맡은 젊은 수좌가 너무 게을러서 청소를 잘 안 하는 겁니다. 다른 스님들이 "구석구석에 먼지가 저렇게 많은데. 책임자가 청소를 안 하면 되겠느냐."며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 수좌가 좌선을 하고 있다가 "세상이 전부 먼지로 되어 있는데 먼지를 어디가 치우란 말인가?"라고 답해서 그 자리에 있던 스님들이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스님들이 그 수좌에게 '먼지수좌'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이 수좌는 일본에 유학가서 공부를 잘했답니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제일 작은 먼지 이야기를 한 다음에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도 곧 세계가 아닐새 이름이 세계다', 비세계非世界라는 구절 앞에 즉卽자를
넣어도 상관이 없고, 안 넣어도 역시 뜻은 '곧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전에 어떤 스님과 지구의 생김새에 대해서 설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 스님도 과학교육에 힘입어 지구가 둥글다는 상식은 알고 있으면서도, "지구는 눈에 보이는 대로 낮은 곳도 잇고 높은 곳도 있고 강이 흐르고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희다. 이것이 지구 아니냐. 왜 자꾸 둥글다고 하느냐.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지구야말로 진짜 실다운 지구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도 지구는 둥근지는 잘 모릅니다.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에 나가서야 지구가 둥글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보면서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말도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는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다. 둥글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이 세계는 사실은 세계가 이나."라고 하는 데 참고가 됩니다. 세계가 곧 세계가 아닌 이유도 여러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편의상 '이것을 세계라고 하자'라고 이름 지어 놓고 부를 뿐입니다."
신청곡 : 금강경찬(안치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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