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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마경(무비스님 강설)-27
普德華 2021-09-23 10:39:52, 조회 : 833, 추천 : 0
2, 목건련과 거사를 위한 설법

佛告大目健連하사대 汝行詣維摩詰問疾하라 目連이 白佛言하되 世尊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이니다 所以者何오 憶念하니 我昔에 入毘耶離大城하야 於里巷中에 爲諸居士說法이러니 時에 維摩詰이 來謂我言하되 唯大目健連이여 爲白衣居士說法인댄 不當如仁者所說이니라

부처님께서 대목건련에게 말씀하였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여라.”
대목건련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분에게 가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억해보니 저가 옛적에 일찍이 비야리대성에 들어가서 마을의 길거리에서 여러 거사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였습니다.

그때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여봐요, 대목건련이여, 백의 거사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려면 스님이 설한 것과 같이 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강설 ; 부처님께서 앓고 있는 유마거사에게 병문안을 보내려고 처음 사리불에게 지시하였으나 사리불이 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다시 대목건련에게 부탁하였다. 대목건련도 역시 과거에 유마거사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 마침 거사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유마거사는 설법의 정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확연하게 가르치는 기회가 있었으므로 그 때를 상기하여 대목건련도 역시 문병을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대목건련이 유마거사에게 들었던 설법의 문제에 대해서 설해지고 있다.

夫說法者는 當如法說이니 法無衆生이라 離衆生垢故며
대저 설법이란 마땅히 여법하게 설해야 합니다. 법에는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때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강설 ; 설법이란 미혹한 중생들을 가르쳐서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리고 법의 실상에 딱 맞게 말하자면 중생이란 없다.

흔히 중생에게는 번뇌의 때가 있어서 그 때를 설법으로 씻어 낸다고 하지만 그것은 소승적 입장에서 하는 여법하지 못한 설법이다.

중생이란 본래 공한 존재며, 나아가서 중생이란 본래로 부처인 존재인 까닭에 번뇌의 때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法無有我라 離我垢故며
법에는 나라는 것이 없으니 나라는 때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강설 ; 소승불교에서 “나[我]”라는 것은 문제, 허물, 과오, 번뇌, 집착 등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나”란 주체며, 주제자며, 자아며, 개아며, 자아에 대한 집착 등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고 하면 당연히 온갖 허물과 때와 죄과와 번뇌와 문제들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다운 불교인 대승에서는 진리 자체[法]에는 나도 없고 나의 때도 없다고 본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니, 나의 때니, 나의 죄과니, 나의 번뇌니 하면 그것은 대승적 큰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못된다.

法無壽命이라 離生死故며
법에는 수명이 없으니 생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강설 ; 수명이란 어떤 존재의 시간적 한계를 뜻한다. 시간적 한계가 있는 것은 모두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진리란 그와 같은 수명이나 시간적 한계가 없다. 그리고 당연히 생긴 바도 없다. 따라서 사멸하는 바도 없다. 부처님의 바르고 참된 이치를 설하려면 이러한 이치에 맞게 설해야 한다.

불교는 언필칭 생사해탈이라고 한다. 생사해탈이란 본래로 생사가 없는 이치를 터득한 것을 말한다.

法無有人이라 前後除斷故며
법에는 인이 없으니 전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강설 ; 경전상에서 인(人)이란 나를 중심으로 한 남이라는 차별의식을 뜻한다. 중생들의 무지몽매한 입장이거나 소승들의 어리석은 안목에서는 나니 남이니 하는 자아의식과 차별의식이 있지만 대승법의 차원에서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따라서 본래로 부처인 까닭에 중생이라는 열등의식도 없다. 그리고 수명이라는 한계의식도 없다. 진리의 입장에서는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하여 영원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법의 입장에서는 중생이 그대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다운 법을 설하려면 이와 같은 이치에 알맞게 설해야 한다. 마치 선사는 입만 떼면 언제나 선도리를 설해야 하는 것과 같다.

여기까지 유마거사의 설법은 금강경의 종지를 요약하여 밝혔으나 강설은 화엄경이나 법화경의 차원으로 좀 더 향상시켜 이야기 하였다.

法常寂然이라 滅諸相故며 法離於相이라 無所緣故며
법은 항상 고요하니 온갖 형상을 소멸하였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상을 떠났으니 반연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강설 ; 불교란 법을 이해하고, 법을 깨닫고, 법을 전하는 일인데 그 법을 어떤 차원으로 이해하고 깨닫고 전하는가가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유마경에서 법을 논하는 안목은 법의 적멸성(寂滅性)과 무상성(無相性)과 무연무작성(無緣無作性)을 위주로 설해졌다.

그러므로 그동안 유마경 이전의 견해인 유위법인 현상과 인연에 대한 교설을 부정하고 무시하며 나아가서 개인의 안락만을 추구하던 소승적 견해에서 보살행을 주장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법을 논하는 입장에서는 철저히 소승적 견해인 유위법인 현상과 인연을 부정하였다.
달리 표현하면 단순한 공(空)의 이치를 설하고 있다.

法無名字라 言語斷故며
법에는 명자가 없으니 언어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강설 ; 법을 단순한 공의 입장에서 보면 명자도 있을 수 없으며 언어도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행할 곳이 없다[言語道斷 心行處滅].”라고 말한 그대로다.

法無有說이라 離覺觀故며
법에는 설함이 없으니 지각하고 관찰함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강설 ; 지각[覺]하고 관찰[觀]한다는 것은 사물을 헤아리는 마음의 조악한 작용을 지각[覺]한다하고 자세한 작용을 관찰[觀]이라 하는데 법은 본래 그와 같은 것을 떠났기 때문에 설할 것이 있을 수 없다. 언어로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보고 느끼고 헤아리는 작용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法無形相이라 如虛空故며 法無戱論이라 畢竟空故며
법에는 형상이 없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희론이 없으니 필경에 공하기 때문입니다.

강설 ; 법은 진리며 존재의 실상이다. 어떤 형상이 있을 수 없다. 존재의 실상은 근본이 허공과 같이 텅 비었다. 그래서 그 비어있는 입장을 허공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법은 희론이 없다 희론이란 무엇인가. 분별심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희론이라 한다. 진리인 존재의 실상을 어찌 분별심으로 왈가왈부하겠는가. 그래서 법에는 그와 같은 희론은 없다. 끝까지 공하기 때문이다.

法無我所라 離我所故며
법에는 나의 것이 없으니 나의 것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강설 ; 존재의 실상인 진리의 입장에서는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너의 것도 없고 나의 것도 없다. 완전무결한 통일된 하나일 뿐이다. “법성은 원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신청곡 : 지장보살 우리 부모(송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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