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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4 10:55:13, 조회 : 945,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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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無分別이라 離諸識故며
법에는 분별이 없다. 모든 의식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강설 ; 눈앞에 드러난 현상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는 의식이 필요하다. 의식이 있어야 모든 것을 분별한다. 그러나 법성의 입장에서는 의식으로 사량분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과 사량분별을 초월한 경지이다.
法無有比라 無相待故며
법에는 비교할 것이 없으니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강설 ; 차별현상에서는 온갖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대하여 비교하지만 법의 입장, 즉 존재의 실상에서는 차별도 없고 상대할 것도 없고 따라서 비교할 것도 없다.
法不屬因이라 不在緣故며
법은 인에도 속하지 않으니 연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설 ; 진리의 당체는 인연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체의 현상들은 모두가 인연으로 이루어 졌다. 인연을 혹은 연기라고도 한다.
저급한 불교에서는 불교의 중요한 교의가 연기의 이치를 깨달아 연기를 설명한 것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의 문제까지도 연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도 한다. 그래서 온갖 6도 만행을 오랫동안 수행하여야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리의 궁극적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설사 무수한 수행을 쌓았더라도 수행을 쌓기 이전의 본래의 그곳[行行發處]인 사람일 뿐이며, 설사 수행을 많이 해서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이르기 이전의 본래 그곳인 사람일 뿐이다[至至本處]. 모든 수행은 인연이며 연기다.
진리의 궁극적 차원에는 그와 같은 수행이라는 인연이나 연기가 존재할 수 없다. 같은 불교라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서로 차원이 다르다. 이 구절은 유마경의 명구다.
法同法性이라 入諸法故며 法隨於如라 無所隨故며
법은 법성과 같으니 모든 법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법은 진여를 따름이니 따르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강설 ; 법이란 사람을 위시하여 유형이나 무형의 모든 존재들을 뜻한다. 그리고 그 모든 존재들에는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본성이 있다. 그것을 법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법성은 모든 존재들에 다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는 통일된 하나다. 이 하나의 이치에 맞게 법을 설해야 제대로 된 설법이라 한다.
또한 법은 진여의 원리를 따르는데 법과 진여는 둘이 아니다. 그래서 따르더라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달리 표현하면 법이 곧 진여라는 것이다.
法住實際라 諸邊不動故며
법은 실제에 머무나니 모든 치우친 것에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설 ; 실제란 허망을 떠난 진실한 진리의 자리며 곧 진여다. 또한 실제는 중도(中道)다. 법이 실제에 머문다는 것은 곧 중도에 머문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치우친 경계[邊]에 대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치우치고 편벽된 경계들을 다 수용하여 조화를 이룬다. 그것이 진정한 법이다. 그러므로 설법을 하려면 이와 같은 이치에 알맞게 치우치고 편벽된 문제들을 다 수용하고 융화하여야 한다.
法無動搖라 不依六塵故며
법은 동요가 없으니 6진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설 ; 사람은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여섯 가지 경계를 만나면 동요한다. 동요하여 끌려 다니다 보면 문제가 발생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고통이 생긴다.
그래서 본래로 동요가 없는 법이라는 참다운 이치와 계합하여 이상적인 삶을 영위하려는 것이다. 동요가 없는 법이 사람에게 인격화가 되면 해탈한 사람, 또는 도인, 법을 깨달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예부터 자신은 법을 몰라도 법을 아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여덟 가지 바람이며, 또는 여덟 가지 경계다. 여덟 가지 바람 즉 팔풍(八風)이란 수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8종의 바람을 말한다.
팔풍은 크게 사순(四順)과 사위(四違)로 나눈다.
“사순”은 이(利), 예(譽), 칭(稱), 낙(樂)의 네 가지이며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바람이다. “사위”는 쇠(衰), 훼(毁), 기(譏), 고(苦)의 네 가지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람이다.
“사순”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이렇다. 이(利) 는 금전적, 물질적인 이익을 말한다. 예(譽)는 명예와 명성을 말한다. 칭(稱)은 칭찬을 받는 것이다. 낙(樂)은 향락과 즐거움을 말한다.
다음 “사위”의 쇠(衰)는 힘의 쇠퇴로 손해를 입는 것이다. 훼(毁)는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나쁜 평판을 받는 것이다. 기(譏)는 남을 나쁘게 헐뜯는 것이다. 고(苦)는 고뇌이며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팔풍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곧 해탈의 삶이며 도인의 삶이며 깨달은 사람의 삶이다.
法無去來라 常不住故며
법은 거래가 없으니 항상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설 ; 이 내용을 화엄경 광명각품에 있는 문수보살의 게송으로 대신하면, “일념보관무량겁 무거무래역무주 여시요지삼세사 초제방편성십력(一念普觀無量劫 無去無來亦無住 如是了知三世事 超諸方便成十力)이 된다.
한 순간에 한량없는 겁을 모두 다 관찰해보니 감도 없고 옴도 없고 머뭄도 없네.
이와 같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을 알고 나면 모든 방편을 다 초월하고 부처[十力]를 이루리라.” 법의 진실은 본래로 이와 같은 것이 그 실체다.
法順空隨無相하고 應無作하며
법은 공을 수순하며 상 없음을 수순하며 지음이 없음에 응합니다.
강설 ;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에 대해서는 법화경 신해품에서 4대 성문제자들이 자신들의 그동안의 수행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한 내용이 있어서 인용한다.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대중들 중에 상수제자(上首弟子)로서 나이는 늙었으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열반을 얻었으며 더 할 일이 없다.”고, 더 이상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존께서 지난 옛적부터 법을 설하신 것이 오래 되셨는데 그 때 저희들이 자리에 있었으나 몸이 피로하여 공(空)과 형상이 없음[無相]과 지을 것이 없음[無作]만을 생각하였습니다.
보살의 법인 신통으로 유희함과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는 것과 중생들을 성취하는 일은 마음에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세존께서 저희들로 하여금 삼계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게 하였습니다.
또 지금 저희들은 나이 이미 늙었으므로 부처님이 보살들을 교화하시는 최상의 깨달음에 대하여는 조금도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오늘 부처님 앞에서 성문들에게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수기를 주시는 것을 듣고는 마음이 매우 환희하여 미증유를 얻었습니다. 생각지도 않다가 이제 홀연히 희유한 법을 듣고 매우 경사스럽고 다행하오며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마치 한량없는 보물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얻은 것과 같습니다.’”
아직도 현상의 문제에 걸려있는 목건련을 깨우치기 위해서 유마거사는 법의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의 차원을 설명하고 있으나 필자가 인용한 법화경은 한 차원을 더 올라가서 부처의 삶을 밝히는 수기의 내용이다.
그들 4대성문의 고백에는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밖에 몰랐으며 부처의 삶인 수기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였다는 뜻이 담겨 있다.
불교의 교의를 간단하게 3단계로 말하면 현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상교(相敎)의 입장과 현상을 부정하는 공교(空敎)의 입장과 또 모든 존재를 진리로 보고 사람을 그대로 부처로 보는 성교(性敎)의 입장이 있다.
유마경의 이 내용은 공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법화경은 성교의 입장이다. 그동안 목건련은 상교의 차원에 있었다.
신청곡 : 빈 몸이 끊임없이-홍순지(부용영관선사 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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