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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4일(목) 아침방송법문 : "복덕을 쌓되 복덕에 집착하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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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4 08:01:22, 조회 : 548,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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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음미해 볼 가르침은 '복덕을 쌓되 복덕에 집착하지 말라'는 한마디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두 날개를 가진 새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한쪽 날개는 복덕을 쌓는 것, 다른 쪽 날개는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무거워지면 새는 제대로 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음을 붙잡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덕을 쌓는 그 순간순간에도 마음은 가볍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시를 하고, 예불을 드리고, 남을 도울 때, 그 착한 마음과 행동 자체는 참으로 아름답고 값진 씨앗입니다.
이 씨앗이 인연을 만나 아름다운 복덕의 열매로 맺히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열매를 내가 꼭 맛보아야 한다는 집착, 내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집착, 그것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유마경에서는 '선근공덕을 구하면서도 그 공덕에 집착하는 것은 큰 병통'이라고 꼬집으셨습니다.
복덕을 쌓는 그 행위 자체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는 새로운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연꽃을 키우려는 사람이 진흙탕에만 매달리다가 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복덕의 진흙은 필요하지만, 우리의 눈은 언제나 피어나는 꽃, 즉 깨달음과 해탈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복덕은 깨달음으로 가는 다리이지, 깨달음 그 자체가 아니다'라고. 이 다리를 건너야 하지만, 다리 위에서 머물거나 다리 자체를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일상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찰에서 봉사를 하실 때,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반드시 좋은 과보가 올 것이다'라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경험, 다들 한번쯤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 기대감 자체가 바로 미세한 집착의 실타래입니다.
또는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도 '내가 이렇게 도왔으니 감사해야지'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드는 것, 이것 또한 집착의 그림자입니다.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보시를 하면서도 보시한 것을 기억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행한 선은 강물에 씻겨 내려가듯 가볍게 놓아주어야만 진정한 공덕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덕을 쌓되 마치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을 헤엄치듯,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핵심은 무심(無心)과 무위(無爲)의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육조단경에서 혜능 스님은 무념(無念)이 본래의 자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생각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덕을 행할 때도 '나는 복덕을 쌓는다.'는 '나'라는 생각, 복덕이라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그때그때 인연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되, 그 행위 뒤에 내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의 구름이 비를 내리지만, 내린 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하루, 법우님들께서 행하시는 모든 선한 행위, 작은 친절 하나, 참은 말 한마디, 따뜻한 미소까지, 그 모든 것이 바로 복덕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을 뿌릴 때 '이게 무슨 과보를 가져올까'하는 무거운 생각은 내려놓으시고, 그저 지금 여기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맑은 마음으로 행해 보십시오.
씨앗은 땅에 맡기면 됩니다.
땅은 결코 그 씨앗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행할 때, 복덕은 집착이라는 독을 잃고, 순수한 깨달음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가벼우면서도 깊은 실천의 길을 걸어가 보시를 부탁드립니다.
법우 여러분, 복덕(福德)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매우 근본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오해받기 쉬운 개념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성찰해 보고자 하는 '복덕을 쌓되 복덕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이 복덕이라는 개념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의 눈을 열어줍니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교훈을 넘어, 깨달음이라는 대목적지로 가는 길에서 우리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합니다.
부처님께서 반야심경에서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이라 하시며 모든 상대적 개념의 공(空)함을 말씀하신 것처럼, 복덕이라는 개념 자체도 우리가 집착할 대상이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복덕을 쌓는 행위, 즉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반야(般若)의 육바라밀은 대승보살도의 핵심 실천입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는 보현보살의 원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중생계를 제도하되, 중생계가 다함이 없으므로 제도함도 다함이 없다'는 무한한 실천을 설하십니다.
이는 복덕을 쌓는 행위 그 자체가 끝없는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 보살이 성장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마경 불이품에서는 유마거사가 수보리 존자에게 보시를 하되 보시의 상(相)을 청정히 떠나지 않으면, 이는 번뇌의 시루에 갇힌 것과 같다'고 엄하게 질책합니다. 여기서 보시의 상이란 바로 '내가 보시한다, 저 사람이 받는다, 나는 이만큼 보시했다'라는 분별과 집착을 말합니다.
이 집착이 보시라는 아름다운 행위를 오염시키고, 그것을 통해 쌓이는 복덕마저도 삼계의 속박으로 전락시키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집착의 위험성은 아함경의 비유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수행자가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을 만들었습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입니다.
그러나 강을 건넌 후에 그 뗏목이 아까워서 머리에 이고 다닌다면 그것은 현명한 일이 될까요?
부처님은 이 비유를 들어, 교법(敎法)마저도 목적을 이루면 놓아버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복덕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사고해라는 광막한 강을 건너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인 뗏목입니다. 하지만 그 언덕에 도착한 후에도 그 뗏목(복덕)을 내려놓지 못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법화경 삼차설법의 비유에서도 아비야방(火宅)에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양ㆍ녹ㆍ소의 삼차(三車)를 유혹으로 제시했지만, 결국 모두에게 준 것은 백우백량(白牛白亮)의 대백우차(大白牛車) 한 대였습니다. 세속적인 복락(양차ㆍ녹차)이나 성문ㆍ연각의 해탈(소차)도 궁극적으로는 일불승(一佛乘)인 깨달음(대백우차)으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복덕 그 자체가 궁극적 목표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관심이나 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높은 차원의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합니다.
중론에서 용수 보살은 공(空)의 의지(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라 하여, 모든 것이 공하다는 깨달음이 오히려 인과와 연기의 법칙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설파합니다.
복덕에 대한 집착이 공함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쌓는 복덕은 더욱 순수해지고 그 힘은 더욱 강력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중생 전체를 향한 무한한 자비와 지혜의 발현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의 해심미처품(海印昧處品)에 나오는 제바달다 보살의 이야기를 기억해 봅시다. 그는 부처님을 해치려 했던 죄로 지옥에 떨어졌지만, 그 순간에도 내가 지옥에 떨어져 모든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다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이 원력의 힘으로 그는 오히려 지옥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 뒤에 중생을 위한 거대한 마음과 과보에 대한 무집착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일상 속에서 이 지혜를 실천하는 길은 생각보다 구체적입니다.
사찰에서 공양을 올릴 때, '이 공양이 부처님께 전해져 나에게 복을 내려주소서'라는 마음보다는 '이 음식이 모든 중생의 배부름과 기쁨이 되소서.'라는 광대한 회향의 마음을 일으켜 보십시오.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나서, '내가 잘했다'는 만족감이나 '고마움을 받아야겠다.'는 기대보다는, 그 행위가 그저 그 순간 필요한 것이었고, 그것이 우주적 인연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여기며 바로 잊어버려 보십시오.
증일아함경에서 부처님은 보시를 하되 보시한 것을 기억하지 않고, 또한 보시한 공덕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집착을 버리는 것이요, 의지하지 않는 것은 복덕에 대한 의탁심을 놓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의 궁극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에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보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무주상(無住相)으로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않는 보시'란, 보시의 대상(육진)과 보시하는 자아(我相), 보시 받는 중생(人相), 보시하는 행위 자체(行相)에 대한 집착을 모두 초월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가장 높은 차원의 보시이며, 그 공덕은 '동방허공가(東方虛空可) 사량부(思量否) 부야(不也) 세존(世尊)'이라 하여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설파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법문 중에 종종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덕은 쌓되, 쌓인 줄도 모르게 쌓으라.' 이 말씀은 오늘 주제의 정수를 꿰뚫습니다.
복덕의 행위는 끊임없이 하되(積), 그 행위가 남긴 자취나 기대되는 과보에 대해서는 마치 바람이 산을 지나가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無積), 마치 새가 하늘을 날아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無住), 그렇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가장 자유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집착의 무게에서 벗어난 복덕의 행위야말로, 진정한 자비와 지혜가 발현되는 순간이며, 그 행위 하나하나가 바로 깨달음의 현현(顯現)이기 때문입니다.
법우님 여러분, 우리가 오늘 쌓는 모든 복덕의 행위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바다에 한 방울 한 방울 이바지되는 거룩한 물방울이 되길 바랍니다.
그 방울 속에는 나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지만, 그 방울들이 모여 결국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위대한 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무명(無明)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복덕이라는 뗏목을 타되, 그 뗏목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그날까지 함께 정진합시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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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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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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