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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불교계소식

 석주(昔珠)당 정일(正一)대종사 圓寂
眞虛性宗 2004-11-19 17:18:53, 조회 : 1,644,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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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과 원로의원을 역임한 조계종 명예원로 석주(昔珠)당 정일(正一) 대종사께서 지난 14일 오후 4시, 온양 보문사에서 圓寂에 드셨습니다.

석주당 정일대종사는 원적에 드시기 며칠 전 “부처님 열반경이 임종게 이거늘, 어찌 임종게를 남기겠는가, 열반경이 임종게이니라”며 임종게를 남기시지 않으셨으며, “사리도 수습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석주(昔珠)당 정일(正一) 대종사는 세납 95세, 법납 81세로, 영결식은 18일 오전 11시, ‘조계종 원로 석주당 정일대종사 원로회의장’으로 범어사 보제루(普濟樓)에서, 다비식은 범어사 다비장에서 봉행됩니다.

석주(昔珠)당 정일(正一) 대종사는 1909년 경북 안동 북후면 옹천마을에서 출생, 1923년 남전스님을 은사로 출가, 1928년 6년간의 행자생활 후 범어사서 득도한 후 1933년 범어사 불교전문강원 졸업하였습니다.

1937년 금강산 마하연사, 덕숭산 정혜사, 묘향산 보현사 등 전국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였으며, 1940년 부산동래 금정선원 원장 역임, 1958년 11교구 불국사주지와 1961년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71년에는 제8대 조계종 총무원장과 불교신문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1976년 10교구 은해사주지를 역임하였습니다.

1977년에는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 1978년 제15대 총무원장, 1979년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1984년 제23대 총무원장, 1990년 동국역경원 이사장, 1994년 종단 개혁시에는 개혁회의 의장을 역임하였습니다.

특히, 1965년 칠보사 어린이회를 창립, 1966년에는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고문 등 어린이 포교와 청소년 포교에도 매진하셨으며, 1965년 동국역경원 부원장으로 추대돼 운허 스님과 함께 한글대장경 편찬사업에 착수하여 318권의 한글대장경을 무려 37년 만에 완간하기도 하였습니다.


석주(昔珠)당 정일(正一) 대종사 행장

석주큰스님은 한일합방 한해전인 1909년 경북 안동에서 탄생하셨습니다.

15세 되시던 해인 1923년 서울 선학원에서 남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6년간 선학원에서 행자생활을 하시고 1933년 범어사 강원 대교과를 마쳤습니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 덕숭산 정혜사, 묘항산 보현사 등 제방 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 참선 정진을 하시며 수선안거를 성만하셨습니다.

1958년 불국사 주지를 역임하신데 이어 1961년 선학원 이사장, 1976년 은해사 주지, 1977년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 1971년, 1978년, 1984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3차례 역임하시는 등 종단행정을 두루 맡으셨습니다. 또한 역경과 교육사업에 남다른 원력을 가지고 1989년부터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 1970년 청소년 교화연합회 총재, 1980년 중앙승가대학교 초대 학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거쳐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1997년 충남 아산에 보문사를 창건하고 외로운 노인을 위한 사회복지시설 안양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평생을 바친 역경불사의 원력

석주스님은 평생 역경에 대한 원력을 세우셔서 한국전쟁 이후에 선학원에서 불교사전을 출판하셨던 운허스님과 함께 1961년 5월 현 동국역경원의 전신인 법보원을 설립하여 역경불사에 활력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열반경, 법화경, 유마경, 육조단경, 현우경, 선가귀감 등을 번역 출판하셨고, 부모은중경, 목련경, 우란분경은 직접 번역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1964년 동국역경원 설립이후에는 운허스님과 함께 한글대장경 편찬사업에 착수, 37년만인 2002년 9월 318권의 한글대장경을 완간하셨습니다. 1989년부터는 동국역경사업 진흥회의 이사장을 맡으시어 역경사업의 활성화에 진력하신 바 있습니다.

큰스님의 역경불사 원력은 주석하시던 칠보사의 대웅전을 친히 ‘큰법당’이라고 현판을 바꾸시고 우리말 경전 보급에 친히 앞장 서셨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불자들에게 한글대장경이라는 귀중한 한글 경전이 출현하여 진리의 빛을 열어준 것은 모두 석주 큰스님의 원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혁신에 헌신하시다.

석주 큰스님은 선학원에서 수행하시는 동안 만해 한용운 스님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선각자들과 교유하시며 민족의식을 싹틔우셨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해방직후부터 석주큰스님을 왜색불교청산과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운동에 앞장서게 만들었습니다.

해방직후에 어떻게 해서든 불교를 혁신시키자는 기치아래 불교혁신운동을 일으키셔서 경봉, 용담, 대의, 석기 스님과 조명기 박사와 이구열, 장상곤 등의 불교 청년, 그리고 혁신회를 만들었던 이종익 박사와 여성동맹이 모두 모여 통도사의 경봉스님을 이사장으로 1946년 불교혁신 연맹을 조직하셨습니다. 1953년부터는 왜색불교 청산을 위해 불교 정화운동을 주도하셔서 마침내 불교 정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큰스님의 저서 ‘한국불교 근세 100년’(중앙일보사 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불교혁신운동과 정화운동을 주도했던 큰스님은 종단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바른 길을 제시하고 그 길에 앞장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이른바 94년 종단개혁과정에서는 개혁회의 의장을 맡아 종단개혁을 손수 지휘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이처럼 현 조계종의 역사의 현장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에서 바른 길을 제시하셨기에 현대 한국불교의 산 증인이라고 일컬어지고 계십니다.

평생 포교에 헌신하시다.

석주 큰스님은 종단이 아직 어린이 포교에 역량을 투입하지 못했던 1965년에 칠보사에 어린이회를 창립하시어 어린이 포교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셨으며 1966년에는 대한불교청소년 교화연합회 고문, 1970년 동회의 총재를 역임하시는 등 청소년 포교에도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또한 총무원장으로 재직하시던 1975년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도록 하여 오늘날 부처님 오신 날을 모든 국민이 경축하게 하도록 만드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큰스님의 이러한 포교의 원력으로 1977년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을 역임하신바 있고 평생 청소년 교화와 경전의 한글화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제 2회 포교대상을 수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후학들의 양성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1980년 중앙승가대학 초대 학장, 1988년 동 대학 명예학장을 역임하시면서 현대식 승가교육의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만년에도 큰스님께서는 칠보사와 봉은사의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불자대중들의 교화에 매진하셨습니다. 1997년 부터는 큰스님과 같은 연배인 노인들의 복지를 위하여 온양 보문사에 불교사회복지 시설인 안양원을 설립하시어 외로운 노인들의 노년을 위한 복지사업에 매진하셨습니다. 이처럼 큰스님은 실로 평생동안 포교활동에 헌신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료출처 : 조계종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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