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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 2007년 가을 정기법회 요약문
眞虛性宗 2007-10-29 12:16:28, 조회 : 1,251, 추천 : 0
  첨부파일 : 20071021.jpg (32kb)   다운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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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씨가 좋습니다.
시월도 이제 하순에 접어들었습니다, 산과 들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습니다. 단풍구경 가는 관광객들이 휴게소마다 넘치고 있습니다. 번잡한 일상사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것은 우리들 삶에 커다란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삶에 아름다움이 없다면 너무 삭막하고 건조합니다. 우리들은 돈과 관계된 것에만 눈이 팔려, 경제 타령 하느라고 삶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아름다움을 등지고 삽니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의 기쁨이고 행복에 이르는 길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만나지 못해 우리들 삶이 아름다움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행복은 아름다움이 받쳐줘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가를, 소유는 욕망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제가 봉은사에 있을 때, 무슨 글을 읽다가 자극을 받아 백제 항아리를 하나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사동에 가서 아는 거사님을 통해서 옛날 백자항아리를 하나 구했습니다. 약간 금이 갔지마는, 며칠 동안은 아주 애지중지하고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켜고 보고 했습니다. 근데 한 달쯤 지나고 나니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항아리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이 아니고 남이 가졌으니 나도 가져보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가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결코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남이 가졌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그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소유욕일 뿐입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소유와 관계없이, 보는 눈과 투명한 감성이 갖추어 있다면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몇 해 전 곤지암 ‘보온 요’에 가서 유약을 전혀 바르지 않고 천연 그대로 구어 놓은 항아리가 눈에 띄어서 유심히 보고 있으려니, 그 요의 주인 김선생이 그 항아리를 선뜻 제게 안겨 주더군요. 항아리가 욕심이 나서가 아니고, 아름다움에 반해서 좋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저 곁에 두고 있으면 그 아름다움이 풍겨 나와 마음이 아주 정갈해 집니다. 조그만 항아리지만 욕심을 갖지 않고 텅 빈 마음으로 바라보니 그 항아리에 든 아름다움을 시시로 캐낼 수 있는 겁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때 거기 비로소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보는 눈과 투명한 감수성은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투명한 감수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순수한 사랑입니다. 순수한 사랑이 없으면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습니다.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마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우리 본성이기도 합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또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좋아하는 것은 그 작곡가의 감성과 우리의 감성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황홀에 빠집니다. 그건 작곡자나 연주자 그리고 듣는 내 자신이 일체감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물을 접했을 때 그 사물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대상이 하나가 될 때 그 대상이 지니고 있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캐내어 만날 수 있습니다.

모든 예술품은 만든 사람에 의해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떤 위대한 예술가라도 자신의 작품에 백퍼센트 온전한 아름다움을 집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만든 사람은 작품에 절반의 혼밖에 불어 넣을 수 없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소장자나 감상하는 사람에 의해서-그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채워집니다. 하나의 음악이 제대로 완성되는 데는 작곡자와 연주자와 듣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제대로 된 아름다움을 경험하려면 그것이 도자기가 되었건, 그림이 되었건, 건축물이 되었건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분별, 욕심을 떠나서 하나가 될 때 아름다움의 극치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얼굴이 아름다운 얼굴일까요? 남·여 할 것 없이 아름다움을 위해서 미장원에도 가고 경대 앞에도 서고 그러지 않습니까? 아름다움에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저 뜰의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단풍은 작년의 것하고 다릅니다. 내일은 또 다른 모습입니다. 순간순간 자기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마음껏 내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보면 그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지만,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작년의 것하고 비교하게 되면 지금 저 나무의 아름다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표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투명한 감수성인 사랑이 있어야 그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마치 조각가가 아무런 표정이 없는 돌덩이에서 아름다움을 캐내듯이.....

임제(臨濟.?-867) 선사어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무사시귀인 단막조작無事是貴人 但莫造作, 있는 그대로가 귀하다. 일부러 꾸미려고 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특한 것입니다.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죠. 남과 비교해서 꾸미려 하지 말라는 거예요. 꾸미게 되면 천연스러움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건 가짜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없는 거리낌 없는 자연스러움이 귀하다는 겁니다. 자연스러움에는 조화와 균형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저마다 자기 얼굴을 스스로 가꾸고 드러내야 됩니다. 그런 얼굴은 아름다움 사랑의 눈으로만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씨는 신용장이다.” 의미심장한 말이에요. 겉으로 드러난 얼굴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맹목적 열기에 속지 말라는 거예요. 추천장은 믿을만한 것이 못 됩니다. 신용장인 마음씨가 고와야 된다는 소리입니다.

아름다움에는 여백餘白의 미美가 있습니다. 동양화에서 여백, 덜 채워진 부분이 그 그림의 격을 좌우합니다. 서양화와 동양화의 차이가 여백의 미에 있습니다. 서양화에는 거의 여백이 없습니다. 동양화는 좀 모자라는 구석인 여백이, 그립고 아쉬움을 남깁니다. 이와 같은 여백의 미는 우리들 삶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가득가득 채우려고만 하면 거기에는 욕망이 작용해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게 합니다. 그래서 추합니다. 그러나 덜 채우면 그 빈자리에 생기가 돌아 시들지 않는 품격이 감돕니다. 뭔가 덜 채워져야 되요. 어떤 여유, 공백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세상사는 일도 그렇습니다. 가득가득 채운다는 것은 욕심스러워요. 그 욕심에 스스로 걸려 넘어집니다. 좀 모자란 듯한 구석, 덜 채워진 구석이 있어야 살맛이 납니다.

아름다움에는 또 거리낌이 없는 무애無碍의 미美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 미륵반가사유상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똑같이 생각하는 모습을 담고 있지만 그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미륵반가사유상에는 고요·평안·잔잔한 미소가 스며있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서있으면 저절로 고요와 평안과 미소가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고요와 평안과 미소가 없고, 고뇌가 깃들어 있을 뿐입니다. 미륵반가사유상에는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는 아름다움이 배어있는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무애의 미가 결여되어 있어요. 무거운 고뇌 속에서 굳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서있으면 그저 무겁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떤 사물을 대하더라도 그 사물이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는 감화를 받습니다. 물론 어떤 작가의 혼이 그렇게 작용하는 거죠. 동양과 서양의 사유상을 통해서도 우리는 동·서 문화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철학자 야스퍼스가 미륵반가사유상을 두고 그토록 격찬한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거리낌이 없는 무애의 시를 한 편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일지 않고,
달이 연못에 들어도 물에는 흔적 없네.’

바람이 부니까 대가 일렁여서 마치 뜰을 쓰는 것 같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먼지 하나일지 않고, 달밤에 달이 연못 속에 들어가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금강경오가해’에 나오는 야보선사 송입니다.

뛰어난 장인은 그 자취를 남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겁니다. 그런데 명예욕이라든가 돈과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만든 작품에는 자취가 남아요. 그 사람이 만들 때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전시회에 가보면 그림이 되었건, 조각이 되었건 혹은 도자기가 되었건, 아무생각 없이 어떤 고정관념이나 그 작가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없이 빈 마음으로 대하면,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인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장인은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함이 없이 안에서 솟아납니다. 그저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꾸어야 솟아나요. 어떤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만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안으로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은 가꾸지 않으면 솟아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밖에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는 내 자신의 문제예요. 자신의 아름다움은 가꾸지 않으면 솟아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이 솟아나도록 하려면, 이웃과 나누는 일을 통해서 자신을 시시로 가꿔야 됩니다.
우리가 참선하고 염불하고 경전을 읽는 것도 내 자신을 가꾸는 일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웃과 나눌 때 내 안에 들어있는 자비심과 좋은 덕성이 샘솟듯 솟아나는 겁니다. 아름다움을 가리켜 시들지 않는 영원한 기쁨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꿔야 합니다.

이 가을에 무언가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저 맨 날, 그날이 그날처럼 그렇게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이 가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단 일회적인, 한 번뿐인 가을이에요. 이런 가을날 그저 이런 대상만 보고 즐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무슨 샘솟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어야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아름다움은 이웃과 나누는 데서 싹틉니다.

이 가을에 다들 아름다움을 만나고 가꾸면서 행복해 지십시오.


자료출처 : 길상사 홈페이지(www.kilsangsa.or.kr) 길상게시판(1505 번째 게시물)에서...
wndtodrnwp [2007-10-30] : 우리네 인생이 어디 까지 갈수가 있을지... 나무관세음보살
arirang44 [2007-10-30] : 아름다움을 품고 아름다움에 영혼이 잠겨 사는 내안을 잘 다듬어 손질하는 맑음을 잃지 않는 영혼이고 싶습니다. 따스하고 귀한 말씀에 우매한 영혼 환희심에 잠깁니다.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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