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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불교계소식

 진묵대사 주제 국내 첫 학술대회 개최...
眞虛性宗 2010-12-04 20:47:40, 조회 : 2,398,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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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진묵조사(震默祖師)사상 학술대회에 참가한 발표자, 관계자들의 기념사진(불기2554년 12월 2일)

진묵대사 열반 377주년을 맞아 추모불사를 발원하고, 한국불교사에 있어 진묵조사의 위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제1회 진묵조사祖師 사상 학술대회가 2일 오전, 전북 완주군 완주문화체육센터 강당에서 열렸다.

봉서사가 주최하고,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 후원으로 열린 학술대회'부처님의 화신 진묵 일옥과 봉서사'에서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장 김방룡 교수가 기조발표자로 나섰다. 제1주제 발표자로 충남대 황의동 교수가 '진묵대사와 유교와의 대화' 제2주제 발표자로 창원전문대학 이덕진 교수가 '진묵설화의 특징과 민중사적 함의' 제3주제 발표자로 동방대학원대 차차석 교수가 '진묵 일옥의 선사상과 그 연원 고찰' 제4주제 발표자로 송광사 선임연구원 김탁 박사가 '한국 신종교에 있어서 진묵대사의 위상' 제5주제 발표자로 전북대 임미선 교수가 '영산작법의 범패와 작법'을 각각 발표했다.

이동녕 우송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1부 주제 발표에서 김방룡 교수는 진묵대사와 같은 고향인 전북 김제시 만경읍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진묵대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들었던 진묵대사는 아주 가까운 시기의 스님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구한말이나 일제시대의 인물로 알고 지냈다. 그런데 그렇게 친근한 진묵대사의 활동시기가 임진왜란 당시이고 더군다나 서산대사나 사명대사와 같은 먼 시기라는 사실에 당황했던 기억이 역력하다며 발표에 들어갔다.

봉서사가 위치하고 있는 산은 서방산西方山으로, 하늘의 영물인 봉황이 깃든 봉서사'鳳棲寺에는 석가모니 후신인 나옹화상, 진묵대사가 머물다 갔다. 그런데 왜? 봉서사의 사세寺勢는 미약하며, 군사정권시절엔 이곳에 군대가 들어서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라며, 자신과 진묵대사의 정서적 친근감을 나타냈다. 전북의 문화속에 진묵의 설화가치는 전북불교의 핵심이며 상징적 존재다. 또 역사적으로는 미륵신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동학의 출현이후 전북지역을 배경으로 등장한 증산도, 원불교 등의 신종교에 있어서 진묵대사의 존재가 다시 부각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묵대사는 유감스럽게도 부처님과는 달리 스스로 어떤 설법이나 문장을 남겨놓지 않았다. '유마거사의 침묵'이 문수보살에게 청천벽력으로 다가왔듯이 설화로 감추어진 '진묵대사의 침묵'이 지금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며, 진묵대사의 문헌 및 자료부족의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교수는 앞으로 진묵대사는 물론 봉서사의 역사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며, 진묵대사의 설화의 배경이 된 구체적인 지역과 진묵대사의 수행터, 주석터, 열반터 등에 대한 고증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태고종은 불교 작법과 의례 그리고 계율전승문제에 있어서 정통성과 실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 봉서사의 영산작법이 존재하며 또한 범패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재현하고 보존할 수 있는 태고종 교단차원의 보다 적극적인 큰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다.

제1주제 발표자 충남대 황의동 교수는 '진묵대사와 유교와의 대화'에서 진묵대사 어머니에게 자신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출가 당시 어머니는 아들 진묵에게 "나에게 아들은 너 하나뿐인데 죽고 나면 제삿밥은 누구가 주느냐?" 라는 말에 "어머님, 걱정 마세요. 천년이 넘도록 제삿밥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며 진묵이 어머니께 드리는 간절한 제문際文을 소개 했다.

하지만 불교는 출가의 문제로 인해 유교로부터 많은 비난과 오해를 받아왔다. 부모처자의 관계를 끊고 출가하는 행위는 인륜을 져버린 패륜의 종교로 비난받아 온 것이 사실이나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시각에서 본 비판 일뿐이지 불교도 유교 못지않게 효를 중시해 왔다는 것을 진묵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효심은 어머니에 바친 제문에서 물론 인간적인 면모를 잘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제2주제 발표자 창원전문대학 이덕진 교수는 ‘진묵설화의 특징과 민중사적 함의’에서 일곱 살 때 봉서사로 출가한 진묵은 그의 총명함은 알아 본 주지스님은 법당에 향을 피우는 일을 맡겼다. 이때 스님의 꿈에 신장이 나타나 감히 부처님의 예를 받을 수 없으니 향 피우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일렀다.

또 진묵대사께서 물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시자에게 말하기를, “저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림자이니라” 하니 시자가 말하기를 “저것이 바로 화상和尙의 그림자 입니다”라고 말하자 다시 대사가 말하기를 “너는 다만 화상의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부처님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구나”라고 하였다고 소개하면서.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한 손은 하늘을, 또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나홀로 높다. 온 세상이 고통속에 있으니 내 이를 평안케 하리라” 고 외친 탄생게는 이 외침이 실제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라. 바로 그런 일을 위해 오신 분이 부처님이라는 민중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교수는 조각가는 자신의 의도대로 나무를 깎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고 있는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진묵은 자신을 드러낸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오히려 당시 호남민중들은 냉대와 착취를 당하고, 종교적 권리마저 빼앗긴 한蛝을 그들의 가슴속에 진묵이라는 도인을 새겨 우러르 나오게 한 것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고 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호남민중들은 이 세상 중생들을 구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오신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강하게 믿었으며, 이러한 사실들은 진묵은 민중친화적인 도인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제3주제 발표자 동방대학원대 차차석 교수는 ‘진묵 일옥의 선사상과 그 연원 고찰’에서 진묵대사는 법력이나 신통력이 탁월했다는 점에서 민중들의 추앙을 받았다. 또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곡차에 얽힌 이야기는 전설처럼 후대에 전해져 오고 있다. 그렇지만 진묵의 명성에 비해 기록은 없는 편이다. 그러니 자연 그의 생애는 설화처럼 부풀러져 민중속에 침투했으며 특히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민중으로부터 열렬한 숭배를 받았다.

심지어 화신불이나 미륵불의 현신으로 최근에 이르기 까지 신종교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렇듯 한번은 진묵대사가 상운암에 거주할 때 탁발승들이 식량을 구하러 멀리 나갔다가 한 달 남짓하여 돌아왔는데, 대사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처져있었고. 무릎사이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대사는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내고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라고 말한 점을 볼 때 대사는 깊은 삼매에 들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노년에는 산문을 벗어나지 않고 불경을 손에 쥐고 마치 석고처럼 않아서 여러 밤낮이 가도록 침식을 폐하고도 스스로를 알 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은 대사의 참선수행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 했다. 차교수는 진묵의 선사상과 그 연원에 대해서는 이락삼매와 수능엄삼매를 들었다.

이 삼매에 들어가면 일체의 존재를 보더라도 즐거움에 대한 집착과 번뇌가 일어나는 현상이 않는 것이 특징이라며, 당나라 이후 선종과 교종사이에 유행하게 돼 선문의 고승대덕들은 능엄삼매를 가지고 깨달음을 인증했다고 소개했다.

이와 함께 진묵스님의 생사관 역시 다분히 능엄경 사상을 이어받았으며, 진묵스님 자신이 자연과 우주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초탈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송을 하나를 소개했다.

“맘껏 취하여 비틀비틀 무애 춤을 추려다
어허, 소매 길어 곤륜산에 걸리겠네“

차교수는 이 시에는 우주 자연과 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이다. 그런 점에서 천지는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동일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제4주제 발표자 김 탁 송광사 성보박문관 선임연구원의‘한국신흥종교에 있어서 진묵대사의 위상’에서 김연구원은 ‘진묵대사는 민중들에게 ’산 부처이자 ‘미륵불의 화신’으로서 숭앙받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불교, 신종교, 무교 등에서 신앙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내용으로 발표에 들어갔다.

진묵에 대한 신앙의 특징은 다른 스님들과는 다르게 ‘부처님의 화신’으로 숭앙하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즉 고승이 아닌 부처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 이것은‘진묵조사유적고’서문에서 초의선사는 “우리 동국東國의 진묵대사는 곧 석가여래의 응신應身이라 한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며 이런 배경에는 진묵이 살다간 시대는 임진왜란의 혼란기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게 되면서 진묵에 관한 신앙이 민중속에 급격히 퍼져나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온 미륵신앙의 일환이기 때문이라고 덧 붙였다.

특히 증산교에 있어 진묵대사의 위상은 대단하다. 증산은 그의 제자들에게 진묵은 단순히 신통을 부리는 승려가 아니라, 천하를 이롭게 할 인물이라고 일러주었다.

증산은 진묵이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릴 정도의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그가 한 유학자의 질투심에 의해 이 땅에 그의 웅대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서양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서양의 문명이 동양보다 발전하게 되었다는 종교적 해석이 있을 정도라고 밝혔다.

또 증산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각 종교의 대표자들을 자신이 새롭게 임명하는 종장‘宗長의 교체를 시도하는데 증산이전에는 석가모니였지만, 이제 증산에 의해 새롭게 임명된 불교를 대표하는 새로운 인물은 진묵이다"라고 기록된 내용을 언급했다. 증산교에서는 증산 다음으로 진묵의 위패를 모시기도 하며, 원불교에서는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가 진묵대사의 화신이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라고 했다.

1925년 소태산이 변산에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진묵대사가 열반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도가 하얗게 되고 바다 위를 사람들이 거닐 때 세상에 다시 출현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김 연구원은 한국신종교에서는 진묵을 ‘부처님의 화신’‘여래’라고 부른다고 했다.

제5주제 발표자 임미선 전북대 교수는 “봉서사 영산작법의 범패와 작법”주제 발표에서 봉서사는 삼천불, 이운법회, 및 영산대제 등을 봉행함으로써 전북영산작법 전통 계승하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태고종을 중심으로 전승되던 범패와 작법이 조계종 까지 확산 되어가고 있으며 영산재뿐만 아니라 수륙대재 봉행도 점차활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운데 범패와 작법의 연행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산재와 같은 큰 재를 행하는 경우 여러 사찰에 소속된 스님들이 모여 함께 연행하게 되면서 지방의 특징이 사라지는 안타까움이 있는데, 봉서사는 영산작법에 봉행함에 있어 외형적 의식 절차뿐만 아니라 전북 고유의 특징이 내재된 범패와 작법을 연구하고 이를 실행하는데 큰 역할을 해야 될 것이라고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날 학술대회 총평에서 우송대학교 이동녕 교수는 “오늘 학술대회에서 한국불교태고종의 거룩한 창종의지를 한 번 생하게 한 소중한 대회였다. 발표자들이 한 결 같이 진묵스님에 대한 자료부족에 따른 연구의 한계를 말했다. 대부분 설화나 내용을 신비화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설화의 내용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설화가 지닌 상징성의 가치를 찾아야 하며 또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도 새롭게 조명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보며, 나아가 오늘 학술대회가 아니었으면 이것마저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파스님은 “진묵대사는 추사 김정희와 깊은 교류를 맺었다. 도성 출입이 금지 되었을 당시 청량리까지 가서 초의에게 편지를 전달한 이야기나, 추사가 중국에 있을 때 주고받은 편지 등 다산 정약용의 문집 속에 비춰진 진묵의 모습을 볼 때 진묵의 주변에는 문인과 예술가들의 접촉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며, 이런 것들을 찾아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 조언했다.

국내 학술대회 사상 최초로 열린 “부처님의 화신 진묵 일옥과 봉서사 학술대회”는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가버려, 흔적도 남김없이 그래서 자료조차 없는.. 진묵대사”라는 부제가 붙을 정도로 빈약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국내 석학들이 한 자리에 모인 훌륭한 대회였다는 게 참석자들의 평이다. 이번 학술대회를 주최한 봉서사 주지 월해 스님은 “‘진묵대사’377주년 열반일을 맞아, 대사의 고귀한 가르침이 수백 년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것은 억압 받고 고통에 머물고 있는 중생들에게 다시 돌아 온 부처님의 화신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봉서사는 역사와 문헌을 토대로 ‘진묵도량 봉서사’의 명성에 걸 맞는 불사를 이룩해 낼 수 있도록 2차, 3차 학술대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료출처 : 행복신문(www.thehappy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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