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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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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5 13:26:46, 조회 : 894,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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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의 가르침 - 불교수행의 목적 부처님이 되는 길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가르치셨는데
첫번째는 고통이라는 것
두번째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
세번째는 고통이 없는 것
네번째는 고통이 없는 것으로 향한 길
이라고 요약하여 말할 수 있다.
고, 집, 멸, 도 에서 세번째 우리 수행의 목표가 되는 '멸' 이라는 것에 있어서 중국어로 단 한글자로 과감하게 번역을 해놓았던지라 나중에 누가 읽고서 '모든 것이 사라진 공허한 상태'가 '멸' 이 아니냐고 오해를 하게 된다. 중국 사람들은 한글자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 한데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 마저도 한글자씩으로 번역하여 읽는이를 혼동시켰으니 그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닌 것이다.
여하튼 '멸' 이라는 점에 있어서 '모든 것이 사라진 공허한 상태, 공' 과 같은 것이 수행의 목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현실이 '고통'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의식상태이며 그 의식상태는 자신의 사고작용으로 인한 지식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그 지식, 정보가 우리 몸이 되어간다고 하셨다.
나마루빠 (명색)은 서로를 창조해가는 것이며 그 존재의 필수요건으로서 '고통' 이 있어서 마음과 몸을 가진 모든 존재는 계속해서 사유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의 축으로 '고통'을 지목하였으며 그것은 '아픈 것' 이다. '아픈 느낌, 고통'이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실존이 이루어진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힘은 '아픔' 이라고 파악한 것이 성스러운 네가지 가르침 중에서 첫번째 '고성제' 이셨다.
그런데 네가지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서 세번째 '멸' 이라고 하는 것을 다만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공허한 상태' 라고 하면 대체 어떤 연유로 그 세번째 자리에 '공허함' 이 들어가야 하겠는가? 네번째 자리에는 그 '멸'의 상태로 가기 위한 '길'을 설하셨는데 그렇다면 첫번째 가르침 '고통' 과 세번째 가르침 ' 멸'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가?
이것은 중국 한문으로 번역을 하면서 너무 간단하게만 번역하다보니 우리 수행의 최종 목표인 세번째 성스러운 '멸성제' 가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은 것이다. '멸성제' 는 '고통이 없음' 을 의미한다.
'고통이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고통을 빼어버린다', '둑카가 빠져있다' 라고도 한다. 고통을 빠알리어로 '둑카' 라고 한다. 그 '둑카'는 실존의 축이어서 빼어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고통없는 삶이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부처님은 '둑카'가 빠진 선정을 구족하셔서 그것을 '닙바아나'라고 하셨다. 모든 사마아디(선정, 삼매) 중에서 '둑카'가 빠지는 선정이 가장 수승하며 그것이 부처님이 추구하신 최고의 선정이다. 이것을 '닙바아나' 라고 한다.
이 '닙바아나' 가 바로 불교 수행의 목표이자 수행자의 벗이 되는 것이다.
'닙바아나' 는 고통이 빠진 상태이며 사성제의 세번째 자리 '멸' 이라는 것의 원래 의미이다. 고통이 없는 선정을 구족함에 있어서 요기는 금욕에 능숙해야 하며 목숨을 버려서라도 성도하겠다는 투지넘치는 의지가 필요하다. 발가락이 썩고 있어도 가부좌를 하고 수행을 하여야 한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면 목으로라도 꾸역꾸역 기어서라도 불도의 길을 계속 가리라는 의지력이 필요하다.
고통이 빠져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항상 알아차림을 날카롭게 하여서 고통의 순환고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 상태에서 비로소 고통이 빠지는 것인지 아닌지 자체를 알 수 있다.
여하튼 '몸과 마음에 고통이 없는 것' 이 불교의 목적이 되는 자리이며 그것이 사성제에서 세번째 자리 '멸성제'이며 실은 '닙바아나' 이며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 '닙바아나'는 한문으로 또 번역되면서 '열반'이라고 음역되었으며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살아생전에 증득하는 지경이 아닌 죽어나간뒤에 '열반하셨다' 고 하여 역시나 오역에 큰 뜻 마저 틀려져 버렸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말씀하시면서 수행의 목적인 '멸성제'가 '현재 지금 이 자리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 이라고 하셨지 '죽고 나서 가는 지경' 이라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닙바아나는 있는 것이며 그런 목적이 있기에 네번째 '도성제'가 있어서 그 지경에 가는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열반' 이라고 하는 것이 죽고나서 비로서 들어가는 지경이라면 대체 살아서 수행을 무엇하러 하는 것인가? 세번째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불교수행의 목적지인데 그것을 죽고나서 가는 자리라고 한다면 살아서 무엇하러 계속 수행을 하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세번째의 '멸' 이라는 한 글자 때문에 여러가지 오역과 오해가 꾸역꾸역생겨서 부처님의 깨끗한 가르침이 많이 오염되었다. 하지만 '닙바아나'는 불교 수행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지경이며 아라한이 아닌 '사다함'의 수준에서도 닙바아나를 경험한 이들이 있다. 닙바아나는 꼭 아라한의 수준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며 그 보다 낮은 수준의 요기들도 닙바아나를 경험할 수 있다. 닙바아나를 경험한 요기를 '니반 Nevan' 이라고 하며 고통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다.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불교의 목적으로 삼고 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멸' 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사라진 공허한 상태' 가 아니며 '고통이 사라진 상태' 이다.
그렇게 해서 사성제를 다시한 번 정리하자면
1. 고성제 : 몸과 마음을 가진 존재는 고통을 축으로 존재한다.
2. 집성제: 고통의 원인에 대한 관찰
3. 멸성제 : 고통이 없어지는 상태
4. 도성제: 고통이 없어지는 상태로 가는 길
이렇게 해서 불교의 요체이자 핵심이 되는 사성제를 고통을 중심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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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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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이 수행의 목적이 아님을 배웠네요. 몸과 마음을 가진 존재는 고통을 축으로 존재하는데 이 고통을 없애도록 수행함이 불교의 목적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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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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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방송에서 하실 필요는 없고 그저 좋은 내용이라 옮겼습니다.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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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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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자운거사님께서 이렇게 글을 올려 주시니 저는 복 터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열반, 유여열반, 무여열반, 사쌍팔배의 확실한 정의가 필요한 듯합니다. 스님께 부탁 올립니다.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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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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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배웠습니다. 글 감사합니다.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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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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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새겨봅니다..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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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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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올려주심에감사드립니다. 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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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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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거사님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배움 합니다. 성불하십시오.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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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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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이 즉 깨달음이군요. 스님 가르침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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