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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금강경 金剛經 정신희유분
常不輕菩薩 2015-06-05 18:43:51, 조회 : 1,278, 추천 : 0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혹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과 글귀를 듣고 참다운 믿음을 낼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길, 그런 말을 하지말라.
여래가 멸도한 후 오백 세에도 계행을 지키고 복을 닦는 사람은, 이와 같은 말과 글귀에 능히 믿음을 내어 이것을 진실이라 여길 것이니라.
마땅히 알라. 이러한 사람은 한분의 부처님, 두분의 부처님, 셋,넷, 다섯, 분의 부처님에게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 없는 천만 부처님 계신 공에서 온갖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러한 말과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깨끗한 믿음을 내느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 없는 복덕을 얻는 것을 다 아시고 다 보시느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이 다시는 나라는 생각,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생각도없고 법 아니라는 생각도 없기 때문이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이 마음에 모양을 지니면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산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며, 만일법이라는 생각을 지녀도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산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며 만일 법 아니다는 생각을 지녀도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산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법도 지니지 말고 법 아닌 것도 지니지 말지니라.
이러한 까닯으로 여래께서 항상 말씀 하시기를, 너희 비구들은 내가 설한 법이 뗏목에 비유한 것과 같은 줄을 알라고 하였나지, 법도 오히겨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느니라..
---------------------------------------------바른믿음의 희유함.


해설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은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항복 받아야 되는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서 대가를 받으려는 마음을 갖지 말며,껍데기에 쏠리지 말고
마음 깊숙이 들어가 참된 이치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껍데기에 탐착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르고 참된 믿음을 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후오백세' 란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이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말합니다.
중생들의 집착과 번뇌가 극에 달하여 부처님의 법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법시대에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바른 신심을 낼 것이며,이러한 신심을 바탕으로 참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신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이며 도의 근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신심은 파괴됨이 없는 공덕의 씨가 되어 보리의 싹을 틔운다" 고 하셨습니다.
바른 믿음은 우리를 불성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신심을 증장시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화엄경>에 보면 '신심은 보시가 되어 나타나 마음에 인색함이 없게 하며,능히 기쁨을 낳아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고,능히 번뇌의 뿌리를 뽑아서 지혜의 공덕을 증장시키며, 능히 여래의 지혜에 이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심이 있기에 계를 지키며 베푸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인색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나쁜 말이나 나쁜 생각,나쁜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참되게 믿으면 참된 열매가 열릴 것이고 제대로 믿지 않으면 쭉정이가 열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를 지키지 않고 복을 닦지도 않으면서 부처님이 무심하시다고 탓을 합니다.
오랜 세월 절에 다녔어도 참다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심각하게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을 투철히 믿는 사람은 진리가 하나임을 압니다.
물질과 정신은 둘이 아니고,행복과 불행도 둘이 아니며, 고통과 즐거움도 둘이 아닙니다.
살아가다 보면 즐거운 날도 있고 괴로운 날도 있는 법입니다.
고통을 피해 가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야 합니다.신심은 일조일석에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걸린 다음 약을 먹는 것보다 미리 예방하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끊임없이 수행정진하여 언젠가 업장이 소멸되기를 기약해야 합니다.
아픔과 쓰라림의 능선을 넘으면서 부처님을 체험해 본 사람만이 흔들리지 않는 신심을 갖게 됩니다.

이토록 어려운 말법시대에 태어나서도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 신심을 내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들은 금생만이 아니라 전생에 많은 부처님 처소를 끊임없이 오가며 선근을 심은 사람입니다.
신심은 금생에만 갈고 닦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법당에 처음 왔는데도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서 낯설지 않고 믿음이 가는 것은 전생에 닦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해서 깨달았다면 우리 마음 가운데 원래 그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마음 속에 깨달음의 씨앗이 있는데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상대성 원리도 아인슈타인이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는데 아인슈타인이 그 원리를 설명하고 증명해 냈을 따름인 것입니다.
팔만사천대장경의 가르침도 이미 우리 마음 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본래 있는 깨달음의 씨앗을 꽃피우기 위해서입니다.

신심은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공덕을 쌓게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여 실천하는 공덕은 그 어떤 것보다 큰 공덕입니다.
실지실견의 실(悉)이란 ' every and all' 의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투철히 믿는 사람을
여래는 모두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보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진기로 찍듯 모두 다 찍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심을 바탕으로 수행 정진하는 사람은 무량한 공덕을 쌓고 무량한 복덕의 문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심성이 강한 민족은 유태인들입니다.
유태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늘 기도하는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생각하는 추상적인 사고가 발달하면서 두뇌가 깨이게 됩니다.
아인슈타인도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연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를 했고 그 기도 속에서 탁월한 영감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종교가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시대에는 아이들도 항상 부처님을 기리고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덕분에 신라가 삼국통일도 이룩하고 찬연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는 항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둘이 아님을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공부를 하면 지혜가 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나 참선을 강조하는 것도 두뇌 능력을 고도로 발휘해서 영원을 관총해 들어가고자 한
대선사들의 예지에 따른 것입니다.

앞에서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네 가지 상을 말했는데 여기에 법상과 비법상이 첨가되어 나옵니다.
법상이란 '이것이 진리다'고 주장하며 어떤 고정된 법이 존재하고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법상은 법이 없는 것이 참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법이 있다는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법이 없다는 상에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법이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남의 방식이 틀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道라고 하면 저것은 도가 아니라고 하는 셈이므로 결국 시비에 휘말리게 됩니다.
나의 방식만이 백 퍼센트 옳은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은 또 그 사람에게 맞는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합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넋두리일 따름입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이 영원히 옳다는 것 또한 결코 보장받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올바르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세월이 지나고 보면 모두 착각이요,
부질없는 것으로 변해버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갠지스 강의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갠지스 강은 지금도 흘러가고 내일도 흐를 것이며 끝없이 흘러갑니다.우리의 삶도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이 우주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가르침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삶을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이나 색깔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별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으며 무지개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어떤 말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엉뚱하게 알아들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히말라야 산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가 '산의 정상에 올라가 본 사람만이 그 기분을 안다.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고정화된 실체가 아니고 단지 우리가 실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눈일 뿐입니다.

마음에 어떤 상이라도 낸다면 그것은 사상(四相)에 집착하는 것이며,
내 것이 옳다거나 네 것이 틀렸다는 마음을 내더라도 또한 사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껍데기에도 머물지 말고 오로지 치우침 없는 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내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논쟁을 초월하여 양극단을 모두 통합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로다.' 두 말이 다 맞는 말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면 산이나 물도 모두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해 보리암에 가보면 쌍홍문이라는 큰 굴이 있는데 그 바위에 조개껍질이 붙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 산이 바다 밑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산도 세월이 흐르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는 말도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논리로 양극단을 떠난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진리는 하나이니 마음 가운데 절대로 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우친 사람은 장벽이 없고 번뇌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가행정진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고정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고정점, 나와 남을 가르는 고정점, 중생이라고 하는 고정점, 수자라고 하는 고정점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수행자입니다.

불교가 표방하는 동체대비나 자타일체의 정신은 모두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은 무한대한 사랑을 말합니다.나를 내세우면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나를 버리고 한 덩어리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강을 건너려면 뗏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단 강을 건넌 다음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뗏목이 소중하고 고맙다고 해도 계속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바른 깨달음을 얻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일 뿐 일단 도달한 뒤에는 아낌없이 버려야 합니다.

진리라는 것도 때가 되면 버려야 하는데 올바르지 못한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마음 가운데 가득 쌓아두고 그 무게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호텔에 잠시 묵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며칠 동안 지내다가 나올 때는 다 두고 나와야 되듯이 인생의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버리는 연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금강경의 가르침도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도 그 수단에 계속 묶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법이건 비법이건 그 모두가 실체가 아님을 확실히 알고 어떠한 상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부처님의 말씀이나 진리라해도 다만 그것을 깨달음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아 의지하고 믿어야 합니다.    /옮김




& 장미 / 이선희
오도행 [2015-06-05] : 바른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불성을 나타내는 지름길인데 언제 어떻게 깨달음의 길에 도달할지 아득하지만 부처님 공부를 하다보면 ~~~그때를 기다리며 올려주신 정신희유분 읽고 또 읽어봅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대덕심 [2015-06-06] : 부처님 말씀 가르침과 깨달음에 법문 감사하게 읽어봅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_()_
常不輕菩薩 [2015-06-06] : 말씀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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